외부 정보를 통해 세상을 알고 탈북해 한국에서 성공 일지를 써가는 탈북 가장이 있습니다. 강원도 고성에서 잠수부인 머구리와 식당을 운영하며 지역 유명 인사가 된 박명호 씨가 주인공인데요. 한반도의 설 명절을 맞아 어제부터 보내 드리는 박명호 씨의 억척 성공 분투기! 오늘은 두 번째 마지막 순서로 박 씨가 한국사회에서 어떤 갈등과 깨달음을 통해 성공을 일굴 수 있었는지 전해 드립니다. 서울에서 김영권 특파원이 보도합니다.
2006년 5월 바다의 사선을 넘어 한국에 정착한 박명호 씨의 첫 직업은 안보강사였습니다.
북한군 장교 출신이란 배경도 있었지만, 북한 내 실상을 정확히 한국과 국제사회에 알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는 겁니다.
[녹취: 박명호 씨] “처음에 여기 와서 이 사회는 먹고 살만하니까 우리가 할 일은 저 말도 안 되는 저 감옥사회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해야겠다, 오직 그 한 가지 생각이었습니다. 그 때는.”
박 씨는 한국은 물론 영국 등 해외까지 나가 북한의 현실과 김 씨 정권의 잔혹함을 적극 알렸습니다.
하지만 1년이 채 되지 못해 벽에 부딪혔습니다.
[녹취: 박명호 씨] “한 고등학교에서 강연 중 학생이 질문을 하는 거예요. 지금 무슨 일을 하시는가? 그래서 (안보강사 외에) 특별한 직업이 없다고 하니까.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북한 사람들이 사회주의체제에서 와서 여기에서 적응을 잘 못해 일정한 직업 없이 탈북자들이. 그런 사람들의 말을 신뢰가 떨어진다는 그런 생각을 가져보신 적이 있는가 하고 질문을 하더라고요. 그 다음 날로 강연을 안 하겠다고 이야기했어요. 북한으로 말하자면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죠.”
그 학생의 질문 때문에 자신의 한국 정착 의미를 되돌아보게 됐고, 무엇이 우선순위인지를 점검하게 됐다는 겁니다.
[녹취: 박명호 씨]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길만이 답이다! 그 다음에 이야기를 해야 사람들이 듣지. 북한에서 이리 건달치고 저리 건달치고 하던 사람이 남한에서 와서 또 그저 직업 없이 일정하게 성공한 거 없이 뭐라고 아무리 외쳐봐야 남한 사람들이 듣지 않는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박 씨는 이후 이삿집센터, 가구배달업,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전기공사 일을 했지만, 뭐 하나 마음에 잡히는 게 없었습니다. 창업하고 싶었던 그에게 큰 도시는 자금 규모가 너무 커 엄두를 내기 힘들었다는 겁니다.
[녹취: 박명호 씨] “도시에서 뭔가를 하려면 창업이라든가 이런 거 하려면 도시는 워낙 돈이 커져서 우리 같은 탈북자가 홀로서기로 일어선다는 게 어렵다고 판단을 했어요.
지방으로 가 돼지를 치며 축산업에 관심을 가져봤지만, 역시 축사와 토지 구매에 수 억원이 든다는 것을 알고 포기했습니다.
결국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이 사선을 넘어왔던 곳. 바다였습니다.
[녹취: 박명호 씨] “이것은 내가 북한에 있을 때 혹시 남조선에 가서 최악의 경우에 내가 다시 잠수를 해서 일하자 하는 생각을 가졌었습니다.”
한국 정착 2년 만에 박 씨는 조업권이 비교적 자유로운 강원도 최북단 고성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머구리 직업은 사고 위험이 컸지만, 일한 만큼 벌 수 있어 보람이 있었습니다.
[녹취: 박명호 씨] “잠수부가 월급쟁이가 아니고 프로수제에요. 여기서는 지분이라고 하는데 잠수부가 35%를 생산량의. 예를 들어 오늘 하루 100만원을 벌었으면 내가 35만 원을 버는 거죠. 그 다음에 목욕비와 파스같은 거 붙이고. 파스라고 하면 북한 사람들 몰라요. 여기 붙이는 거 약.”
머구리 일을 정오 전에 끝낸 뒤 박 씨는 다시 생선 벗기는 일 등을 하며 부지런히 돈을 모았습니다.
[녹취: 박명호 씨] “그 때 나는 또 놀지 않고 급물배 들어오는 데 고기 벗겨주고 그랬죠. 그럼 다 돈을 주니까. (그래서 한 달에 수입이 얼마셨나요?) 보통 한 달에 6백만~7백만 원.”
2년 만에 어선을 사고 이후 집을 장만하고 큰 횟집도 열었지만, 박 씨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합니다.
[녹취: 박명호 씨] “나나 우리 집사람이나 탈북 이유를 우리는 40살 이상 북한에서 살았는데, 살 수 있어 그런데 자식들 생각해보면 너무 답답해서 우리가 거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까 그게 아니에요. 우리 일이 더 급한 거예요 (노후생활 준비 말씀인가요?) 네 우리가 더 급한 거예요. 자식들은 아무 문제 없어요. 젊었다는 한 가지만이라도 다 밑천이에요.(웃음)”
한국이 이미 고령화 사회이기 때문에 노후 생활자금 마련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겁니다.
[녹취: 박명호 씨] “지금 와서 보니까 우리 위해서 (한국에) 온 거예요. 내가 다른 일을 할 수 없죠. 끝까지 해야죠. 왜냐하면 우리나라 지금 고령화 사회잖아요. 다 나이 먹었어요. 다 나보다 나이 이상이에요. 다른 잠수부들. 70세인 잠수부도 있어요. 생산 활동 별로 떨어지지 않아요.”
지금은 아내가 자신보다 더 한국 생활에 만족한다며 뿌듯해 하는 명호 씨. 자녀들과 가족형 사업을 꿈꾸는 가장이지만, 처지가 비슷한 탈북민들에 대한 정도 넉넉합니다. 자기처럼 성공을 꿈꾸며 고성으로 오는 탈북민들에게 조언도 하고 도움도 주는 맏형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녹취: 박명호 씨] “고성군에 임대아파트가 없는데도 (포기하고 옵니다) 그래도 내가 1호고. 그 후에 많이 찾아왔어요. 잠수부도 많고 배 타는 사람도 많고. 왔다가 실패해서 간 사람도 있고 성공한 사람들도 많고.”
과거 한국전쟁 때 함경도에서 내려온 많은 실향민이 속초에 둥지를 튼 것처럼 고성에 정착하는 탈북민도 늘고 있다고 박 씨는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유대인 정착촌이나 과거 수많은 동독인이 서독에 정착한 것처럼 한국에도 더 많은 탈북민이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녹취: 박명호 씨] “(한국 정부가) 임대아파트를 주니까 탈북자들은 좋단 말입니다. 임대아파트라도 이 쪽으로 틀면 더운물이 나오고 저쪽으로 틀면 찬물이 나오지. 방안에는 단추 하나 누르면 따뜻하지. 그러니까 여자들이 좋아합니다. 그런데 탈북자가 직업이 문제이지 집이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집을 중심으로 직업을 구하려는 현상이 생깁니다. 그 주변에서만. 그야말로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거죠.”
자기 적성과 기호에 맞는 직업을 전국적으로 찾아야 하는데, 임대아파트가 아쉬워 도전을 꺼리는 탈북민이 많다는 지적.
박 씨는 북한에 있는 주민들도 자유를 찾아 새로운 삶에 도전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박명호 씨] “북한 사람이 제일 고민하는 게 저렇게 고도로 발전한 한국사회에 나가서 내가 할 일이 있겠나? 거지 되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 그 생각은 모르고 하는 얘기입니다. 여기 농어촌은 일할 사람이 없어서 문제잖아요. 일거리는 많은데 일할 사람이 없어서 문제잖아요.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들 데려다 쓰고. 북한 사람은 알몸으로 나와도 다음날부터 일당 받아 일할 수 있어요. 북한 노동대중은 100을 일해도 1프로도 안 되는 것을 받고 살았어요. 그 사람들이 여기 와서 100을 일하면 80을 받는데 싫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어요?”
박명호 씨는 오늘도 한 가닥 숨줄에 의지해 수심 30미터 바닷속으로 들어갑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분단의 경계선을 넘은 지 13년째. 지금도 삶 자체가 “생과 사의 경계선”이라고 말하는 명호 씨.
북한을 탈출해 바깥세상을 먼저 경험하고 성공적인 삶을 일궈가는 그가 북한 주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녹취: 박명호 씨] “기회는 본인이 만들지 않으면 영원히 없어요. 본인이 꿈을 꾸고 시도하면 언젠가는 되더라고요”
서울에서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