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전체 핵 동결 없이 핵 물질을 계속 생산하는 상황에서 일부 핵 시설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폐기 등 ‘스몰 딜’은 큰 의미가 없다고 한국의 일부 전직 관리들이 밝혔습니다. 반면, 유엔 안보리의 대북 결의는 확고하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시도해 볼 만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김영권 특파원이 보도합니다.
한국 전문가들 사이에서 미-북 간 ICBM 폐기 합의 등 이른바 ‘스몰 딜’ 합의 가능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인의 안전이란 궁극적 목표에 초점을 둬 ICBM 폐기에 집중할 경우 한국만 북 핵 위협에 놓일 수 있다는 우려. 그리고 비핵화의 핵심인 핵 프로그램 동결과 신고 없이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 등 핵 물질을 계속 생산하는 상황에서 미래를 확약할 수 없는 ICBM 폐기 등 ‘스몰딜’은 의미가 별로 없다는 겁니다.
김성한 전 외교통상부 2차관은 31일 ‘VOA’에, “미국이 ICBM을 먼저 다루는 것은 핵 프로그램 신고를 유예받으려는 김정은 정권의 전략에 말려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김성한 전 차관] “북한은 자신이 갖고 있는 핵 프로그램을 철저하게 숨기면서 미국이 우려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안만 일부 해결해 줌으로써 미국으로부터 반대 급부인 소위 대북 제재 완화…”
북한이 절대로 핵 프로그램을 신고하지 않을 테니까 우선 가능한 것부터 하자는 논리가 타당해 보이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북한이 핵 프로그램부터 신고하는 게 국제 비확산체제가 요구하는 비핵화의 기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김 전 차관은 그러면서 국제원자력기구( IAEA)가 비핵화를 결심한 국가의 핵 동결과 신고라는 초기 조치 없이 사찰하는 경우는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지낸 황준국 전 영국주재 대사는 ICBM을 폐기하고 핵 물질을 동결하는 합의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황준국 전 대사] “(북한이) 중거리 탄도미사일 생산시설과 미사일 기술 연구개발은 계속할 텐데 ICBM만 폐기한다는 게 기술적으로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북 핵 개발의 제1 목표는 대미 억지력 확보인데 그러려면 미 본토를 위협하는 ICBM이 필수요소이기 때문에 영구적으로 완전한 ICBM 폐기에 북한이 동의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ICBM을 몇 기 보유하고 있는지 불투명하고 그것을 모두 내어 줄지도 분명하지 않으며 사거리를 어떻게 검증할지도 쉽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한국 국방부는 지난 15일 공개한 ‘2018 국방백서’에서 북한의 핵미사일이 고도화됐다며 사거리 5천 500km 이상인 ICBM이 5종류라고 지적했지만, 규모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습니다.
황 전 대사는 영변 핵 시설의 동결과 북한 전체의 핵 동결은 다른 얘기라며, 현 상황에서 더 큰 문제는 핵 동결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황준국 전 대사] “김정은은 작년도 신년사에서 핵탄두 대량 생산을 지시했는데 이는 영변 밖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북한이 완전히 변하여 전체 그림을 신고하지 않는 한 미국도 영변 이외 지역의 고농축 우라늄 등 그런 핵 활동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북 핵의 전체 동결은 사실상 검증이 불가능합니다.”
전문가들은 고농축 우라늄의 경우 플루토늄과 달리 감추기 쉽고 규모가 적은 시설에서 제조할 수 있어 위성이나 인적 정보로도 추적이 쉽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따라서 북한이 보유하고 생산 중인 전체 고농축 우라늄 규모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중 일부를 보유한 영변 핵 시설의 폐기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합니다.
황 전 대사는 영변 핵 시설의 폐기 사안이 미-북 간 ‘스몰 딜’이 될 것 같다며, 이런 부분적 비핵화 조치는 어느 정도 의미는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관건은 상응 조치가 비례적이어야 한다”며 “전체 그림을 모르는 상황에서 영변의 핵 폐기가 어느 정도의 값어치를 갖는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상응 조치는 보수적으로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핵 전문가인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장은 한국의 외교적 입지가 좁아진 상황에서 “ICBM 같은 ‘스몰 딜’은 종전 선언과 주한미군 철수 등 한국의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상황으로 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녹취: 김태우 전 원장] “중국과 북한은 밀착하고 중국과 러시아도 밀착하고 사회주의 국가에 균형을 맞춰야 하는 자유 진영에서는 한-미 동맹이 깨지고 한-일 동맹 깨지고 이런 상황에서 스몰 딜이란 것은 더 나쁜 시나리오로 가는 징검다리로 갈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미국에서 동맹을 흔들거나 한국의 안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양보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게 중요하죠. 가령 종전 선언 같은… ”
하지만 큰 그림에서 ICBM과 같은 ‘스몰 딜’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오준 전 유엔대사는 “미국이 북한이 취한 조치보다 너무 많은 양보를 해서 (독자) 제재를 조금 완화해 줬다고 해서 북한의 비핵화란 대세에는 지장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오준 전 대사] “큰 그림을 보면서 결국 비핵화가 되어야 유엔 제재가 해제됩니다. 유엔 안보리 제재는 결의를 통해 된 것이기 때문에 안보리의 결의는 국제적으로 볼 때 입법과 같은 효과를 가집니다. 국제법입니다. 그래서 그 제재가 어떤 조건이 충족돼야 해제된다는 게 이미 다 유엔 결의에 나와 있습니다. 북한이 핵무기와 미사일 능력을 포기해야만 제재가 해제됩니다.”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란 확고한 틀은 지속되기 때문에 무엇을 먼저하고 나중에 하는 이른바 ‘시퀀스’의 문제에 대해 너무 우려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오 전 대사는 또 미국이 자신들의 안보에만 집중하고 동맹을 무시하며 북한을 파키스탄처럼 사실상의 핵국가로 인정할 수 있다는 우려도 지나친 기우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파키스탄은 북한처럼 유엔 안보리의 강력한 제재를 받은 사례가 없고 이웃인 인도와 전략적 핵 균형이 맞았기에 가능했지만, 동북아에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해 한국·일본이 핵무기를 추구하는 상황은 미국과 중국, 러시아가 절대 용인하지 않을 것이란 겁니다.
[녹취: 오 준 전 대사] “큰 그림을 본다면 결국 북한이 비핵화를 하느냐 안 하느냐이고 북한이 비핵화를 하면 제재가 해제되는 겁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중간에 정치적 딜 부분적 딜이 반복된다면 전체 비핵화 과정이 길어질 뿐입니다. 전체 비핵화 과정이 빨리 이뤄져 북한과의 관계가 정상화되길 원하는 사람은 그런 부분적 정치적 딜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북 핵 6자회담 수석대표를 지낸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소속 이수혁 의원도 한 언론에 “심장수술을 할 사람이 감기가 걸렸으면 감기부터 나아야 본격적인 개심수술을 할 수 있다”며 북한의 핵 신고도 단계적으로 신뢰를 쌓아가며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의원은 북한이 전체 핵 목록을 제출한다고 해도 신뢰 여부를 놓고 논란이 계속될 것이라며, 단계적 접근이 북한 비핵화를 위한 빠른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서울에서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