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전문가들은 미-북 협상에서 한국의 중재자 역할을 거부한 북한의 담화에 대해, 한국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 풀이했습니다. 미국이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한국 정부가 압박해 달라는 메시지라는 해석도 나왔습니다. 서울에서 안소영 기자가 전해왔습니다.
북한이 권정근 외무성 미국담당 국장의 담화를 통해 미국하고만 대화하고, 한국과의 대화는 거부하겠다는 태도를 보인 데 대해 전문가들은 ‘북한의 역설적 행동’으로 풀이했습니다.
통일연구원의 조한범 선임연구원은 28일 VOA와의 전화통화에서, 이번 대남 메시지는 오히려 한국에 역할을 주문한 것으로 관측했습니다.
[녹취: 조한범 선임연구원] “한국 정부에 중재자 역할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엄밀히 따지면 오히려 자기들이 원하는 결과를 도출해 내는 데 미국을 압박해 달라는 그런 의미가 있고요.”
조 연구원은 현재 북한 입장에서는 ‘영변’을 내놓으면, 그에 따른 상응 조치를 얻는 핵 협상안이 도출되기 바라지만, 그렇게 되지 않자 한국을 압박하고 나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미-북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려면 북한에 유리하고, 북한이 바라는 형식의 협상이 이뤄지도록 도우라는 것이라는 겁니다.
김흥규 아주대학교 교수는 최근 중국과의 정상회담에서 한국과 대화할 의지가 있다고 밝힌 북한이 이번 담화를 통해 ‘이중적 태도’를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김 교수는 현재 북한은 미국과 한국 모두와 대화하기 바란다며, 향후 협상을 앞두고 내놓은 일종의 메시지로 해석했습니다.
[녹취: 김흥규 교수] “현재 분위기에서 완전히 대화하지 않겠다라는 것이 아니라, 대화는 하고 싶은데 한국은 북한이 원하는 것에 호응해 달라는 강한 요구이기도 하고요.”
한국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 등 남북 경제협력을 위해 유엔 대북 제재가 일부 완화될 수 있도록 나서달라는 것일 수 있다는 게 김 교수의 진단입니다.
아산정책연구원의 신범철 안보통일센터장은 하노이 회담 결렬 후 한국에 대해 쌓인 불만이 이번 담화를 통해 표출됐다고 말했습니다.
신 센터장은 북한은 한국 정부의 설득으로 9월 ‘평양 공동선언’에 영변 핵 시설을 영구적으로 폐기하겠다고 밝혔는데, 이 점이 ‘영변’의 값어치를 떨어뜨렸다고 믿는 것 같다고 설명했습니다.
영변과 관련된 사안이 하노이 회담의 가장 큰 결렬 원인으로 꼽히면서, 북한은 결과물을 도출하지 못한 2차 정상회담의 책임을 한국 정부에 돌리려 한다는 겁니다.
신 센터장은 또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스웨덴 방문 연설 내용과, 한국 정부 고위 관계자의 발언 역시 북한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신범철 센터장] “연설 중에 북한이 핵을 포기해야 한다는 식의 발언이 북한의 심기를 건드려 불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정부 고위 관계자의 발언 가운데, 남북 간에 물밑접촉이 있고 교류가 잘 되고 있다는 인터뷰 내용이 불편했을 수 있습니다.”
다만, 북한의 이같은 대남 메시지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의 임을출 교수는 북한의 이번 담화 내용은 대화 단절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면서, 판문점 선언과 평양 공동선언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는 데 대한 불만을 표출한 것이라고 풀이했습니다.
또한 담화 발표 시점이 미-한 정상회담 직전이라는 데 주목하며, 미국이 유연한 태도를 보일 수 있도록 한국 정부가 의미 있는 역할을 해주기 바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임을출 교수] “지금 이 순간까지는 미국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 없다는 평가를 북한이 하고 있거든요. 그런 부분에서 한국 정부에 대한 기대감이 낮아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에 방한하면 미국 측의 보다 유연한 태도를 견인해 주기를 여전히 희망하고 있다고 보는 거죠.”
하지만 간극이 큰 현 미-북 관계에서 한국 정부가 중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입니다.
김흥규 교수입니다.
[녹취: 김흥규 교수] “현재 문재인 정부 입장에서는 미국과 공조를 같이하고, 유엔 제재를 단독으로 와해시키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 분명한 기조라서 서로간의 접점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
임을출 교수는 한국은 기본적으로 미국과 공조해서 북한과의 새로운 협상에 대비해야 한다는 입장인 만큼, 궁극적으로 북한의 결단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이 지금보다 유연한 협상 태도를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겁니다.
신범철 센터장은 우선 이번 미-한 정상회담에서 한국 정부는 최소한 정치적으로라도 미-한 동맹 강화 메시지를 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동맹이 강화돼야 북한 문제 등을 주도적으로 풀어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수 있다는 게 신 센터장의 분석입니다.
[녹취: 신범철 센터장]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등에 대한 지지를 하면서 한국은 동맹 편에 선다는 메시지를 최소한 정치적 차원에서라도 보여줘여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미-북 대화에 한국 정부는 참견말라’는 북한의 담화에 대해 한국 정부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김은한 통일부 부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정부는 남북 공동선언을 비롯한 남북 간 합의를 차질없이 이행해 나간다는 입장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남북, 미-북 간 대화의 조속한 재개를 바탕으로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정착을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북한의 담화에 대해, 한반도에서의 비핵화와 평화 프로세스가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외교부는 정례브리핑에서, 이번 사안에 대해 별도로 언급할 사항이 없다고 답했습니다.
앞서 북한 외무성의 권정근 미국담당 국장은 “조미 대화의 당사자는 우리와 미국이며 남조선 당국이 참견할 문제가 전혀 아니"라며, 남북한 사이에 다양한 교류와 물밑대화가 진행되는 건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서울에서 VOA 뉴스 안소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