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미국 진보주의의 아이콘으로 최근 타계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의 이야기입니다.
2020년 9월 18일, 성차별을 없애고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는데 앞장섰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향년 87세로 타계했습니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대법원장을 포함한 9명의 최고법원 판사 중, 샌드라 데이 오코너에 이어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연방 대법관이자, 첫 번째 여성 유대계 대법관이었습니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1933년 3월 15일 뉴욕시 브루클린에서 셀리아 엠스터와 네이선 베이더의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이름은 조안 루스 베이더였습니다. 그러나 학교에서 조안(Joan)이란 이름을 가진 학생이 많은 것을 알게 돼 그 이름은 떼어버리고 루스(Ruth)만을 이름으로 사용했습니다.
뛰어나게 공부를 잘했던 루스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전액 장학금으로 뉴욕의 명문 코넬 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대학 첫 학기 중 루스는 장차 남편이 될 마틴 긴즈버그를 만났습니다. 마틴은 나중에 미국의 저명한 조세법 법률가가 됐습니다.
마틴과 루스는 1954년 코넬대학교를 졸업한 후 결혼했습니다. 마틴이 2년간의 군 복무를 마친 뒤 두 사람은 하버드 법률전문대학원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루스 긴즈버그는 학과목을 이수하는 동안 하버드 법대 간행물인 ‘Harvard Law Review’의 편집진의 일원으로 일했습니다. 권위 있는 이 간행물에서 여성 편집인은 루스 긴즈버그가 처음이었습니다. 이 기간에 긴즈버그는 아이를 키우면서 고환암 진단을 받은 마틴도 보살펴야 했습니다. 남편은 암이 치유된 다음 뉴욕시에 있는 법률회사에 들어갔습니다.
루스 긴즈버그는 컬럼비아 법률전문대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그녀의 뛰어난 학교 성적과 경험에도 불구하고 루스는 변호사로 취업을 하지 못했습니다. 주된 이유는 여성이고 아이까지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에 여성 변호사는 극소수였고, 연방 판사로 재직중인 여성은 단 두 명뿐이었습니다.
그러자 컬럼비아 대학의 한 교수가 연방법원 뉴욕 남부 지원 판사를 설득해 루스가 그곳 서기로 일을 할 수 있게 주선해 주었습니다.
루스 긴즈버그는 1963년 뉴저지 주립대학인 럿거스 대학 법대 부교수 직을 제의 받았습니다.
루스는 교편을 잡는 동안 아들 제임스를 잉태했습니다. 루스는 그 사실이 알려지면 재계약이 안 될까 봐 커다란 옷을 걸쳐 입고 배부른 것을 감추고 다녔습니다. 다행히 1969년 루스 긴즈버그는 종신 교수직을 얻게 됐습니다.
1970년 긴즈버그는 성평등에 대한 법적인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성해방이라는 주제의 법대생 토론회에 소개와 진행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으면서부터였습니다. 긴즈버그는 다음 해 이를 주제로 한두 건의 글을 법률 전문지에 싣는 한편 성차별 문제를 다루는 과목도 가르쳤습니다.
1970년대 긴즈버그는 성차별 소송에서 가장 주목받는 법률가로 떠올랐습니다. 1972년에는 컬럼비아 법대 최초의 여성 종신 교수가 됐습니다. 긴즈버그는 여러 판결, 대법원의 성차별 소송 사건에 대한 법적 견해를 발표했습니다. 럿거스와 컬럼비아 법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성차별 관련 판례집도 만드는 등 여성과 성 소수자 인권 강화에 애썼습니다. 이 시기 긴즈버그는 6건의 대법원 소송에 관여했으며 그중 5건을 승소한 기록을 수립했습니다.
1980년 지미 카터 대통령은 긴즈버그를 연방 항소법원 워싱턴 디시 판사로 임명했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긴즈버그 판사는 예리한 심리로 실용적 진보주의자의 명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은 긴즈버그 판사를 은퇴한 바이런 화이트 대법관 후임으로 지명했습니다. 긴즈버그 판사는 쉽게 의회 인준 청문회를 통과했습니다. 8월 10일 긴즈버그 판사는 선서식을 갖고 대법관으로 취임했습니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개개의 사건에서 사실관계와 적용 가능한 법에 의거해 비록 대중이 원치 않는 결정이라도 공정하게 판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대법원에 입성한 지 얼마 안 된 1996년 긴즈버그 대법관은 버지니아사관학교(VMI)가 여학생을 받아들이지 않은 데 대한 소송에서 여학생 입학 거부는 평등권 보호에 위배된다는 주장을 관철시켰습니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미 육군 장교를 양성하는 학교의 고된 훈련을 남성들과 똑같이 완수할 수 있는데도, 여성이기 때문에 입학이 거부된다는 것은 부당하며, 성별을 떠나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에 기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2015년 동성 결혼 합법화 판결문에선 결혼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한다며, 결혼은 시민법적인 전통에 기반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법리적인 입장에서는 결코 양보가 없고 다른 진보파 대법관들과 같은 표결을 했지만, 대부분의 보수파 대법관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2010년대 중반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는 반대한다’, 극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2018) 등이 나오면서 연로한 대법관은 갑자기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떠오르는 스타가 됐습니다. 그의 얼굴이 그려진 머그잔과 티셔츠, 열쇠고리도 등장했습니다. 긴즈버그대법관은 악명높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라는 의미로 ‘Notorious RBG’ 라는 애교 있는 별명도 붙여졌습니다. 시사주간지 타임, 인기 텔레비전 토크쇼에도 긴즈버그가 등장했습니다.
그의 타계 소식이 전해지자 신문 방송은 다투어 여러 날에 걸쳐 특집을 내보냈습니다. 연방 대법원 건물에는 반기가 걸리고 법원 앞에는 그를 추모하는 촛불과 조화가 쌓였습니다. 워싱턴 D.C. 건물 벽에는 긴즈버그의 대형 초상이 그려졌습니다. 긴즈버그의 사망으로 보수 5명, 진보 4명으로 구성된 미 대법원은 보수색이 짙어질 가능성이 커지면서 정가에서는 그의 후임 문제를 놓고 정치적 논쟁이 촉발됐습니다.
인생의 모든 굴곡과 병마, 차별에 맞서면서 혁명과 같은 변화를 가져온 여성 대법관의 시신은 대법원과 연방 의사당에서 조문을 받은 다음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