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이 올해로 70주년을 맞았습니다. VOA는 어제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한국전쟁의 의미와 시사점을 되돌아 보는 기획보도를 전해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순서로 장진호전투와 흥남철수 작전 당시의 생생한 증언을 전해 드립니다. 김동현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겹겹이 껴입은 옷안으로 파고드는 살을 에는 듯한 영하 30도(섭씨)의 한파.
당시 22살이었던 미 육군 7사단 31보병연대 본부중대 소속 레이몬드 라드케 하사는 조용히 담배에 불을 붙이며, 지난 몇 시간 동안 전방 지휘초소에서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쉴새 없이 총을 갈기던 모습을 떠올립니다.
동이 트자 어둠이 걷히고 얼어붙은 호숫가 주변에서 베일에 가려졌던 형체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때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꽁꽁 얼어붙은 시체더미 속에서 포착된 미묘한 움직임.
올해 92세가 된 라드케 예비역 원사는 VOA에, 70년 전 얼어붙은 주검들 속에서 부상입은 중공군 병사 한 명이 상체를 일으키며 도움을 요청하듯 절규했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어깨만 으쓱했을 뿐, 이내 얼어 죽도록 그냥 내버려뒀다고 밝혔습니다.
[녹취: 라드케 미 육군 참전용사] “When the sun came up then the Chinese withdrew and we had a lot of dead and dying Chinese stretched out across the frozen inlet and all over the place. And I sitting there smoking a cigarette, and a Chinese soldier raises up and he wants help. He's probably maybe 50, 60 feet from me. And I look at him and I just shrugged my shoulders…Probably going to join him in another day or so. And he just eventually died. He froze, I guess.”
어차피 며칠 뒤면 자신도 그 중공군 병사처럼 싸늘한 시체가 될 운명이라는 생각뿐이었다고, 당시 심정을 담담히 전했습니다.
1950년 11월 26일부터 약 보름간 유엔군 3만여 명과 중공군 7만여 명이 격돌한 장진호전투의 참전용사를 일컫어 미국에서는 장진의 일본어 발음과 소수의 생존자만 돌아왔다는 의미를 따 ‘초신 퓨’ (Chosin Few)로 부릅니다.
라드케 씨가 속했던 미 육군 7사단 31보병연대는 중공군의 야습으로부터 장진호 서쪽에 포진한 미 해병대 1사단이 완전 포위섬멸되는 것을 막도록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연대장 앨런 맥클린 대령이 숨지는 등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장교단만 90% 이상 전사했습니다.
라드케 참전용사 “벌지전투보다 더 혹독하고 절망적”
“호수에 얼어붙은 시체 즐비…포로로 붙잡혔다가 탈출”
라드케 씨도 당시 포위망을 뚫던 중 다리에 총격을 입고 부상당한 뒤 중공군에 포로로 잡혔지만, 이내 탈출에 성공했고 수송기로 후송됐습니다.
[녹취: 라드케 미 육군 참전용사] “I talked with a guy at one of the reunions who participated in the Battle of the bulge and he said that it was far worse at Chosin… Battle of the Bulge wasn't hopeless. East of Chosin particularly was almost a totally hopeless situation. And we were destroyed, you know.”
라드케 씨는 장진호전투가 “2차세계대전 당시 추위 속에서 독일군에 포위됐던 아르덴대공습, 이른바 ‘벌지전투’ 보다도 더 혹독했고 절망적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한때 야포지휘소였던 그 곳은 117명의 미국과 영국 해병대 전사자들을 매장하기 위한 장소로 쓰였고, 꽁꽁 얼어붙은 땅을 파기 위해 불도저까지 동원됐다”
당시 미 해병대 1사단 1대대 중대장으로 복무한 고 에드윈 시몬스 예비역 준장의 회고록 ‘얼어붙은 초신’의 일부입니다.
지난 2007년 85세로 별세한 시몬스 전 준장은 평균 영하 30도를 밑돈 당시 한파는 2차 세계대전 때 유럽전역의 동계전투들과 비교해도 미군이 전혀 직면해보지 못한 전장 환경이었다며, 진정한 적은 중공군이 아닌 추위 그 자체였다고 말했습니다.
장진호전투에서 유엔군은 1천29명 전사, 4천582명 부상, 중공군은 3만여 명의 사상자와 4천여 명의 동사자를 낸 것으로 추산됩니다.
결국 유엔군사령부는 중공군에 포위 섬멸당할 것을 우려해 1950년 12월 8일, 장진호에서 철수해 함흥, 흥남 지역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메이슨 참전용사 “철군 과정도 혹독하고 긴 여정”
“한명의 피난민이라도 더 구하자는 공감대 있었다”
미 서부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장진호전투 생존자 모임 지회장인 도널드 메이슨 해병대 예비역 중사(90세)는 “혹독한 추위가 엄습했던 철수 당시 길 양 옆으로 유엔군, 중공군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녹취: 메이슨 미 해병대 참전용사] “My first impression was the number of casualties of both sides alongside the roads…It was very cold getting assaulted on both sides on the way that long hard trip.”
당시 미군과 함께 자유를 찾아 떠난 피난민은 10만여 명 이상으로 추산됩니다.
미 해병대 1사단 501mm 박격포 대대 소속 상병으로 참전한 메이슨 지회장은 철수과정에서 민간인들이 한 명이라도 더 빠져나오도록 노력했던 점에 아직도 자부심을 느낀다며, 당시 미군 내에는 공산정권 아래 이들이 겪을 고통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녹취: 메이슨 미 해병대 참전용사] “We had to take them out. We wanted to get them out. We know what they were going to go through. Shared part of that agony.”
존스홉킨스대학 국제대학원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제임스 퍼슨 교수는 당시 상황을 두고 철수라는 측면에서는 패배지만, 나중에 다시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측면에서는 성공한 철수였다고 평가했습니다.
[녹취: 퍼슨 교수] “There were also rumors that the Chinese were killing everyone in their wake including North Korean civilians. And so those rumors also motivated people to make to flee…Technically a defeat because it was a withdrawal. But it was a successful withdrawal that permitted them to fight another day.”
특히 이북주민들 사이에서 중공군이 학살을 자행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진 것도 대규모 피난이 발생한 배경 중 하나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유엔군이 적극적으로 피난민을 포용한 대목은 인도주의적 측면에서도 큰 성공이었다고 덧붙였습니다.
메러디스빅토리호 14000명 피난민 태워 세계신기록
러니 당시 일등항해사 “빨리 빨리 표현 현장서 배워”
피난민 1만 4천여 명을 태워 기네스 세계신기록을 달성한 민간화물선 메러디스빅토리 호도 핵심 역할을 했습니다.
메러디스빅토리 호의 일등항해사였던 제임스 로버트 러니 미 해군 예비역 소장(92세)은 VOA에, 한국영화 ‘국제시장’ 등에서 묘사된 혼란스런 장면은 잘못된 것이라며, 피난민들은 하나같이 침착했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러니 당시 일등 항해사] “We poured in as many people as we could. We knew very little Korean. I remember the Pali Pali (Keep move rapidly)…we encountered with getting the people aboard Pali Pali at that time, but no special anecdote. People were pleased to come aboard and they were all great people to come in.”
러니 당시 일등항해사 “덩케르크 철수보다 한층 성숙 ”
“흥남철수 당시 침착했던 한국민이 진정한 영웅”
러니 예비역 소장은 당시 피난과정은 2차 세계대전 초기 프랑스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된 40만여 명의 연합군 철수작전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달랐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러니 당시 일등 항해사] “In a way yes and in a way No. We upgraded under very dire circumstances. The weather was very oppressive. The enemy was closing rapidly on a beachhead and evacuation, I think was somewhat different than that(Dunkirk). As the enemy, communists were closing in rapidly around the port, the ships were trying to get people out as many people as possible. Some what similar to Dunkirk but in a way entirely different. I am not sure how to explain it but we did the best we could and the real heroes were the Koreans.”
혹독한 날씨 속에서 적들이 항구를 향해 포위망을 빠르게 좁혀오는 상황에서 이뤄진 철수가 덩케르크 당시 보다 훨씬 성숙한 측면이 있었다는 겁니다.
러니 예비역 소장은 선박들은 최대한 피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 과정에서 침착함을 보여준 한국민들이 진정한 영웅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존 스콧 로겔 미 해군참모대학 교수는 개인의견을 전제로 전술교리상 적의 추격을 받는 와중에 철수하는 것만큼 어려운 도전도 없다는 관점에서 흥남철수는 영웅적이었다며, 후세가 미국판 덩케르크로 평가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밝혔습니다.
[녹취: 로겔 교수] “I think from a US standpoint, it's perhaps can be the equivalent of a US Dunkirk. It does deserve …It's heroic, it's challenging and obviously retreating and falling back in contact is probably one of the most difficult military operations to conduct.”
빈센트 브룩스 전 주한미군사령과 겸 유엔군사령관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장진호전투와 흥남철수의 의의를 평가해달라는 VOA의 요청에, 자유를 갈구하며 떠난 피난민을 수용하고자 한 결정이 마지막 순간에 이뤄졌다며,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브룩스 전 사령관] “Fortunately, the evacuation was made possible as a last minute decision. And while not sufficient, at least a great number of lives were saved… So this is a reflection of something that may be there even now. Not everyone was able to get out of North Korea. And as we've seen defectors through many years, there's a desire to live free and the North Koreans presently cannot do so. And so is that an indication of what awaits us in the future desire to be free among the people of North Korea? I think that it is.”
흥남철수는 현재와 미래의 북한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으며, 우리 모두는 자유롭게 살고 싶은 의지를 가진 탈북민들을 오랫동안 목격하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브룩스 전 사령관은 지금 북한주민들은 그렇게 할 수 없지만, 미래에는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나올 것이라는 징후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역사학자들은 장진호전투 당시 유엔군 실종자로 집계된 4천894명 가운데는 포로로 잡힌 이들도 많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프랑수와 일병 심각한 부상 뒤 33개월간 포로 고초
“석방 뒤 몸무게 절반으로 줄어…평생 악몽 시달려”
장진호전투 미 육군생존자모임의 재무책임자 샤메인 프랑수와 그리피스 씨는 자신의 부친 제라드 프랑수와도 장진호전투 과정에서 전쟁포로로 붙잡혔었다고 말했습니다
프랑수와 씨의 부친은 당시 일병으로, 미 육군 31보병연대 3대대 지휘관인 윌리엄 라일리 중령의 직속 무전병이었는데, 포로로 잡힐 당시 수류탄 파편에 얼굴을 맞았고 박격포 파편이 두 다리를 관통했으며, 중공군 병사의 총검에 찔린 상태였습니다.
33개월 뒤인 1953년 8월 마지막 포로교환에서 풀려났을 당시 그의 체중은 77kg에서 31kg으로 줄었고, 당시의 기억 때문에 201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녹취:프랑수와 그리피스 재무책임자] “He spent 33 months and his body weight went from 170 pounds to 70 pounds…He couldn't sleep. He had a horrible time sleeping. And so he started a towing company. And so he had calls during the night and he'd get up”
오늘날 장진호전투 미군 생존자들은 모두 90대를 넘겼고, 그 수는 해가 갈수록 급격히 줄고 있습니다.
메이슨 지회장은 최근 미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더 이상 머나먼 나라들의 오랜 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그러면서, 장진호전투와 흥남철수의 역사적 교훈을 다음 세대가 잊을까 두렵다고 말했습니다.
메이슨 지회장은 자신의 세대는 “어렸을 적부터 국가와 세계 평화 수호의 사명을 띨 것을 배우며 자랐고, 다시 참전할 수만 있다면 할 것”이라며 “후회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메이슨 지회장] “I was brought up to believe what we have a duty to our country and to the world to protect it… I had no reason to change my mind why I shouldn't be there. I thought that was part of my duty as an American citizen is to give back to the country…And I’d do it again if I was younger.”
메이슨 지회장은 참전의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최근 한국을 방문해 눈부신 번영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점을 한국민 스스로가 증명한 사실이 매우 자랑스럽다”고 강조했습니다.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보내 드리는 기획보도, 내일은 세 번째 순서로 참전용사들이 보는 `미-북 관계와 남북한’에 대해 전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