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아메리카 원주민, 일명 인디언들은 서부로 다가오는 백인들이 자기들 지역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했습니다. 이 시간에는 아파치족 추장으로 인디언 저항투쟁의 뛰어난 지도자 중 한명인 코치스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800년대 중반, 미국 남서부 지역에는 백인 정착민이 극히 드물었습니다. 이 일대는 대대로 아파치 족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아파치 족은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그 중 하나로 치리카후아 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오늘날의 아리조나 주 남부와 뉴 멕시코 주를 삶의 터전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치리카후아 아파치의 추장 코치스는 아파치 패스 (Apache Pass)라는 곳을 왕래하는 백인 여행자들이나 군인들에게는 익숙한 이름이었습니다. 아파치 패스는 이 일대에서 유일하게 마실 물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치리카후아 족과 백인 정착민들의 관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인디언들은 정착민들에게 나무를 팔기도 했습니다.
1858년 코치스는 백인 우편물 송달업체 버터필드 오버랜드 메일 컴패니 (Butterfield Overland Mail Company)에 아파치 패스에 휴게소를 짓토록 허락했습니다. 이로써 코치스는 우편 배달원이나 여행자들이 이곳을 지나 캘리포니아로 무사히 갈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1861년 2월, 조지 배스컴이라는 육군 장교가 코치스에게 몇가지 문제가 생겼으니 대화를 하자고 요구했습니다. 제기한 문제는 목장에서 소가 몇 마리 없어졌다는 것과 농장에서 어린 소년 한명이 실종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지 배스컴 소위는 상부로부터 실종 어린이를 찾는데 모든 방법을 동원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배스컴 소위는 인디언과 문제를 처리해본 경험이 전혀 없었습니다.
코치스는 키가 180cm가 넘어 아파치 족으로서는 큰 편이었습니다. 그는 단단한 광대뼈에 콧날이 오똑한 전사였습니다. 코치스는 치리카후아 족장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족을 이끌어 가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당시 50대 중반이었던 그는 드물게 보는 강력한 아파치 지도자였습니다. 그런 코치스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배스컴 소위는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첫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만이 관심이었습니다.
코치스는 농장을 습격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군인들이 친선을 위해 자신을 찾아오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파치 식 신뢰의 표시로 부인과 아들, 동생, 그리고 두 친척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나 배스컴 소위는 그런 뜻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배스컴의 장막 안에서 만났습니다. 코치스는 미군에게 자기 부족은 농장을 습격한 일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찾는데 모든 협력을 다 하겠다고 제의했습니다. 또한 아마도 치리카후아 족 북쪽에 사는 흰산의 아파치(White Mountain Apaches)의 소행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여러 해 뒤, 코치스의 말은 사실로 증명됐습니다.
그러나 코치스가 소년을 숨겨놓고 있다고 믿은 장교는 코치스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처음 코치스는 장교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농담을 하는 줄 알았습니다. 배스컴 소위는 잃어버린 소와 소년을 돌려받을 때까지 코치스에게 그의 가족과 일행을 연금해 두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사태를 파악한 코치스는 번개같이 단도를 빼어들고 천막을 찢은 다음 그 구멍으로 탈출했습니다. 밖에서 군인들이 코치스에게 총을 쏘았지만 그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한명도 탈출을 시도했지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코치스는 그런 혼란 속에서도 미국인 네명을 인질로 잡고, 막사에 포로 교환을 하자는 메모를 남겨놓았습니다. 그러나 배스컴 소위는 이틀 동안이나 그 메모를 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야 그것을 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고 말았습니다. 미군은 코치스의 동생과 친척들을 목매달아 죽인 뒤였습니다. 부인과 아들은 돌려보냈습니다.
코치스는 다른 인디언들이 한 짓을 자기가 했다며, 친선을 위해 찾아간 자신을 죽이려 한 백인들은 절대 믿을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코치스는 즉각 보복을 위한 계획에 착수했습니다. 먼저 백인 포로 4명을 살해했습니다. 그는 ‘이제부터 나의 삶은 오직 그들과 전쟁을 하는 것 뿐’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사건은 그후 여러 해 동안의 폭력과 테러의 발단이 됐습니다. 코치스는 아파치 여러 부족들과 연합해 미군과 남서부 쪽으로 이주해 오는 백인 정찬민들을 공격했습니다. 아파치의 공격은 워낙 치열해 군인과 정착민들은 후퇴를 해야 했습니다. 한때는 아파치가 오늘 날의 아리조나 주 일대를 모두 장악했습니다.
코치스의 투쟁에 관한 소식은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그는 마치 어떤 위기에서도 보호를 받는 사람처럼 용감했습니다. 어떤 미군은 그가 말의 옆에 붙어 달리며 말을 방패로 삼고 싸웠다고 말했습니다.
1862년, 약 2천명이나 되는 군인들이 제임스 칼튼 장군의 지휘 하에 캘리포니아에서 아파치 패스로 행진했습니다. 미군은 태평양 연안과 동부 사이의 통신망을 다시 복원하려는 작전 임무를 띄고 있었습니다.
이때 코치스는 약 500명의 전사들을 아파치 패스 부근에 매복시켰습니다. 미군이 가까이 오자 아파치는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치헤네이 아파치 족 추장 맹가스 콜로라다스가 중상을 입었습니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그는 6개월 후 백인 군인들을 찾아가 평화합의를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군인들에게 붙잡히고 살해됐습니다. 맹가스의 피살은 코치스에게 백인은 신뢰할 수 없는 자들이라는 믿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습니다.
그후 코치스는 모든 아파치족을 지휘하는 최고 추장이 됐습니다. 코치스와 그의 전사들은 아리조나 남서부 일대를 돌아다니며 백인들을 보이는 족족 고문하고 살해했습니다.
미국 연방정부는 모든 아파치를 살해하거나 체포하는 전략을 시작했습니다. 코치스와 약 2백명의 아파치 전사들은 아리조나의 치리카후아 산맥에 숨어들어 위기를 모면하곤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새로운 백인 정착촌들이 세워졌습니다. 아파치는 계속 이들을 상대로 치고 빠지는 공격을 가하고 산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장장 12년에 걸쳐 코치스는 미국과 멕시코 군의 체포를 피해가며 활동했습니다. 아리조나 주 당국은 그를 공공의 적 1호라고 선포하고 그를 체포하거나 살해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백인들 사이에서는 코치스가 그 누구도 볼수 없는 신출귀몰한 자라는 이야기가 퍼져 나갔습니다.
코치스는 워싱턴으로 가서 연방정부와 협상을 하라는 어떠한 제의도 거부했습니다. 백인은 믿을 수 없다는 철저한 믿음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인 타자에게는 워싱턴으로 가도록 허락했습니다. 불행히도 타자는 워싱턴에서 폐렴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워싱턴의 한 묘지에 묻혔습니다.
1870년 미군의 조지 크룩 장군이 아리조나 지역의 통치를 맡았습니다. 그는 많은 아파치들에게 보호구역을 정해 살게 해주며 그들의 환심을 샀습니다. 그러나 그의 최대 목표는 코치스 문제의 처리였습니다.
코치스는 자기 종족을 아리조나의 보호구역에서 살수 있도록 협상하기 위해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연방정부는 그때 이미 다른 아파치 족을 뉴 멕시코에 있는 낫선 보호구역으로 이주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코치스는 아파치를 고향 땅이 아닌 다른 어떤 곳으로 옮기는 안에도 반대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산으로 들어가 숨어버렸습니다.
1872년 봄, 코치스는 평화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비밀 은신처에서 올리버 오티스 하워드 장군과 만났습니다. 그해 여름 양측은 아리조나의 치리카후아 지역에 보호구역을 마련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하워드 장군은 아파치 인디언들이 고향인 그곳에서 영구히 거주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코치스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런 약속을 받아낸 다음, 코치스는 더 이상 투쟁을 중단하겠다며 자수를 선언했습니다. 코치스는 보호구역에서 평화롭게 살다가 1874년 사망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 연방정부는 조약을 무시하고 아파치 족을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아파치 족 일부는 그러한 조치에 저항했습니다. 제로니모와 코치스의 아들 나이체는 산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리고 10년 동안이나 고향 땅을 찾기 위한 투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끝내는 항복하고 더 멀리 떨어진 낯선 곳으로 보내졌습니다.
코치스는 아파치의 고향 땅을 지키기 위해 격렬히 투쟁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패했습니다. 그는 어느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이란 누가 땅을 차지하는가의 싸움이다. 그러나 결국 땅이 사람을 차지하는 것이다. 누가 감히 땅을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도 죽으면 땅에 묻히고 마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