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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따라잡기] 반유대주의와 이슬람 공포증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학교 학생들이 교내 반유대주의 폭력 방지 조처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자료사진)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학교 학생들이 교내 반유대주의 폭력 방지 조처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자료사진)

뉴스의 배경과 관련 용어를 설명해 드리는 ‘뉴스 따라잡기’ 시간입니다. 이스라엘과 미국이 테러단체로 지정한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간 전쟁이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더불어 곳곳에서 반유대주의와 이슬람 공포증 기류가 확산하면서 우려를 더해주고 있는데요. 뉴스 따라잡기 이 시간에는 반유대주의와 이슬람 공포증에 관해 짚어보겠습니다.

“반유대주의란?”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을 특정해 증오심, 편견, 적대감 등 반감을 드러내는 인종주의입니다. 영어로는 ‘Antisemitism’이라고 하는데요. 반대한다는 의미의 전치사 ‘anti’와 ‘셈족’을 뜻하는 ‘semitism’이 합쳐진 겁니다.

셈족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인 ‘노아’의 장남 ‘셈’에서 따온 것으로, 유대인뿐만 아니라 아랍인도 이 셈족에 속합니다. 그 때문에 ‘antisemitism’, 반셈족주의라고 하면 엄밀히 말해 유대인은 물론 아랍인까지 다 반대, 증오한다는 건데요. 하지만 2차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을 집단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진 이후, ‘antisemitism’, 이 반셈족주의라는 말은 유대인들에 국한된 ‘반유대주의’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유대인’에 관해서도 짚어보고 가겠습니다.

흔히 이스라엘 민족을 ‘유대인’이라고도 하는데요. 엄밀히 구분하면 이스라엘인이라고 해서 모두 유대인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유대인은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하나인 ‘유대 지파’에서 나온 종족적 개념이고, 이스라엘인은 국가적, 영토적 개념에서 사용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인 모두 유대 혈통을 가진 유대인이거나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은 아니라는 겁니다.

일각에서는 이스라엘 정책을 비판하거나 이스라엘 정부를 비난하면 반유대주의, 반유대주의자라는 인식을 보이는데요. 이런 무조건적인 등식은 위험한 사고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합니다.

“반유대주의의 역사”

반유대주의 기조 또는 정서는 언제부터, 또 왜 생겨난 걸까요?

반유대주의는 오늘날 갑자기 생겨나거나 확산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는 수백 년 동안 여러 형태로 인류 역사에 존재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AD 70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한 사건을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말합니다. 역사 신학자 김성은 워싱턴신학교 교수의 설명 들어보시죠.

[녹취: 김성은 워싱턴신학교 교수] “이때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수 많은 유대인들은 노예로 팔려 가거나 지중해, 유럽을 비롯해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지게 됐습니다. 이후 이들 유대인은 1948년 스스로 독립 국가를 선언할 때까지 나라 없는 민족으로 박해와 고통, 추방, 배제의 대상이 됩니다.”

반유대주의에 대한 종교적 시각도 있습니다. 다시 김성은 교수의 설명입니다.

[녹취: 김성은 워싱턴신학교 교수]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은 1세기에 태동한 기독교를 이단으로 배척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300년 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하게 되고, 그로부터 중세 시대를 거쳐 유럽 크리스텐덤에서 기독교가 확산하는데요. 이때에 유대인들이 기독교의 창시자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고 죽였다고 해서 그들을 증오하게 되고, 그들을 서유럽에서 추방시키는 반유대주의의 역사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뿌리 내리게 됐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사회 문화적 이유를 꼽는 관점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 살든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고 그들의 종교와 문화, 전통을 고수하는데요. 해당 사회에 협력하지만 동화하지 않는 이러한 모습이 반유대주의의 요인이 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반유대주의 사례들”

역사적으로 반유대주의 사례는 매우 많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큰 사건 몇 가지만 꼽자면 중세 시대 십자군 전쟁, 19세기 후반에 있었던 드레퓌스 사건, 그리고 2차 대전 독일 나치 정권에 의한 유대인대학살(홀로코스트)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1095년부터 1291년까지 서아시아 일대를 피로 물들인 종교 전쟁입니다. 이 시기, 서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은 9번의 대규모 출정을 통해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기 위한 정복 전쟁에 나섰는데요. 십자군이라고 불린 이들 군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원정길에 닥치는 대로 이교도들을 처형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깃발과 복장에 십자가 문양을 새긴 이들에게 이교도는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뿐만 아니라 이른바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도 해당했습니다. 신앙의 순수성을 수호한다는 기치 아래, 수많은 유대인이 고문과 화형에 처해졌는데요. 200년 넘는 기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됐는지는 제대로 알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반유대주의의 대표적 사건,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유대인대학살이 있습니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이 집권하면서 독일에는 반유대주의가 급격히 확산했습니다. 나치 정권은 많은 급진 반유대 법들을 만들고 유대인들을 차별했는데요. 그중 하나가 ‘게토’라는 특별 구역을 만들어 이들을 일반 사회와 분류하고 폭력적 행동을 가한 것입니다. 급기야 나치 정부는 1941년 이른바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이라는 주장으로, 유럽의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하기로 합니다. 이때부터 1945년, 독일이 연합군에 패배할 때까지, 무려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요. 나치 정권의 홀로코스트는 반유대주의의 가장 극악한 모습을 보여준 범죄행위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슬람 공포증”

‘이슬람 공포증’은 이슬람 문화권과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인 무슬림, 혹은 이슬람 종교 자체에 공포감을 느끼는 것을 말하는데요. ‘이슬람 혐오증’으로 일컫기도 합니다. 영어로는 ‘Islam’과 공포를 뜻하는 ‘phobia’를 합쳐 ‘Islamophobia’라고 하는데요. 이슬람교에 대한 혐오와 편견, 적대감, 심지어 이슬람교를 악마시하는 정서나 행동까지 이슬람 공포증의 범위에 넣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슬람 공포증 확산”

이슬람 공포증의 정의와 형태, 범주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이런 정서 자체는 중세 유럽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아주 오래된 것입니다. 십자군 원정 당시 이슬람 세계에 행했던 십자군들의 잔학 행위, 반대로 이슬람의 유럽 정복 과정에서 보여졌던 유럽인들의 두려움은 이슬람 공포증의 단편들입니다.

하지만 2001년 발생한 미국에 대한 9.11 테러 공격은 당시까지만 해도 비교적 유럽에 국한해 있던 이슬람 공포증의 개념을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건입니다.

당시 이슬람 급진 테러단체 알카에다의 공격으로 3천 명 넘는 무고한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는데요. 이후 지난 20여 년간, IS 같은 이슬람 무장 세력의 무차별 테러 공격, 인질극 등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이슬람 공포증 현상은 전 세계로 더 빠르게 확산했습니다.

여기에 중동의 계속되는 내전으로 난민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이슬람 공포증은 혐오, 편견과 섞여 더 악화하는 경향을 보였는데요. 하지만 이슬람 사회는 이슬람 공포증은 인종주의이며, 이슬람교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된 실체 없는 편견이라며 반발합니다. 미디어의 부정적이고 과장된 보도 등으로 인해 이슬람은 곧 테러 집단, 무슬림은 난폭하다는 식의 일반화 오류를 빚고 있다는 겁니다.

“이슬람 공포증 사례들”

이슬람 공포증 사례 역시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많습니다. 지난 2019년 뉴질랜드에서 발생한 이슬람 사원 총기 난사 사건으로 약 50명의 무슬림이 목숨을 잃은 것은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입니다.

이슬람 공포증은 아울러 그 유형이 매우 다양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개인을 향한 신체적 폭력이나 모욕적 행위를 비롯해 중동 출신 난민들을 배척하는 것도 광범위한 의미에서 이슬람 공포증의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이슬람 공포증의 사례는 다른 대륙에 비해 역사적, 지리적 이유로 이슬람권과 교집합이 많은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요. 일례로 관용의 나라 프랑스는 유럽에서 이슬람 인구가 가장 많습니다. 하지만 점점 더 이슬람 공포증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습니다.

엄격한 정교분리 원칙은 오늘날 프랑스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데요. 프랑스 정부는 이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공공장소에서 이슬람 여성들의 전통 복장 착용 금지 등의 조처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사회에서는 이를 반이슬람, 반무슬림, 이슬람 혐오증에서 출발하는 조처라고 반발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또다시 부상하는 반유대주의와 이슬람 공포증”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분쟁으로 또다시 전 세계 곳곳에서 반유대주의와 이슬람 공포증이 부상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반유대주의, 이슬람 공포증이 각국의 반이민, 반난민 정책과 맞물리면서 세계 정치 지형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더욱 심화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미국에서도 최근 반유대주의 사건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옹호단체인 ‘반명예훼손연맹(ADL)’에 따르면 분쟁이 시작된 지난달 7일부터 23일까지 보고된 반유대주의 사건은 300건이 넘는데요. 60여 건이 보고된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400% 가까이 증가한 것입니다.

반면 이슬람 공포증 관련 사건도 크게 늘었습니다. 미국 최대 무슬림 권익옹호단체인 ‘이슬람관계위원회(CAIR)’는 지난달 25일, 770여 건의 불만 또는 사건을 보고받았다고 밝혔는데요. CAIR에 따르면 이는 지난 2015년 이후 최대치입니다. 당시 대선 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무슬림의 미국 입국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큰 논란이 일었습니다. 현 바이든 정부는 반유대주의는 물론 이슬람 공포증에도 반대하는 입장인데요. 이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일 하니예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지도자

최근 뉴스에서 화제가 된 인물을 소개하는 ‘뉴스 속 인물’ 시간입니다. 오늘 주인공은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지도자 이스마엘 하니예입니다.

미국이 테러 단체로 지정한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 분쟁이 한 달 넘게 계속되면서 하마스 지도부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하마스의 정치 지도자는 이스마엘 하니예입니다. 하니예는 지난 2019년부터 정확한 거처를 노출하지 않고 카타르, 튀르키예 등지의 초호화 호텔에서 지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스마일 하니예는 1962년 가자지구 난민촌에서 태어났습니다.

하니예는 유엔이 가자지구 난민촌에 설립한 학교에 다녔고요. 가자지구이슬라믹대학교에서 아랍문학을 전공했습니다.

학창 시절 이슬람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그는 1988년 ‘하마스’가 출범하자마자 가담했습니다.

하니예는 1989년 이스라엘에 대한 팔레스타인 민중 봉기인 ‘제1차 인티파다’을 주도했다가 이스라엘 당국에 체포됐습니다.

그리고 3년 복역 후 하마스 주요 지도자, 대원 약 400명과 함께 레바논으로 쫓겨났는데요. 하지만, 1993년 미국 중재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오슬로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가자지구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하마스의 대이스라엘 무장 투쟁은 이어졌고요. 이스라엘의 반격에 하마스 지도자들이 사망하면서 하니예는 하마스 내 일인자가 됩니다. 그리고 그가 이끈 하마스는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 참여해 파타당을 누르고 압승을 거뒀습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총리직에 오르는데요. 하지만, 평화적 외교 해법을 지향하던 마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계속 마찰을 빚었습니다.

결국 2007년 압바스 수반은 하니예를 해임하고 내각을 전격 해산하는데요. 하니예는 이에 반발해 가자지구에 하마스가 주도하는 자치 정부를 수립하고 사실상 수반 역할을 해왔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테러단체로 규정하고 있고요. 하니예는 미 국무부의 ‘특별지정국제테러리스트(SDGT)’ 명단에 올라 있습니다.

뉴스 따라잡기, 이 시간에는 반유대주의와 이슬람 공포증에 관해 살펴봤고요. 뉴스 속 인물로 이스마일 하니예 하마스 지도자 소개해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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