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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잊혀진 한국전 영웅, 월튼 워커 장군


[인물 아메리카] 잊혀진 한국전 영웅, 월튼 워커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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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 시간입니다. 한국전이 벌어지자 미 8군 사령관으로써,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부산 방어선을 끝까지 지키며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었고, 중국의 참전으로 상황이 악화되자 신속한 결단으로 수 많은 장병들의 희생을 막은 월튼 워커 장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월튼 해리스 워커는 1889년 12월 3일, 텍사스 주 벨튼 (Belton)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하고 1,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습니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포함한 여러 주요 전투에서 용맹과 뛰어난 지휘 능력을 과시했으며, 많은 훈장을 받았습니다.

전쟁이 끝나면서 그는 중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중장 진급식에서 패튼 장군은 워커를 가리켜 어떤 면에서나 뛰어난 투사라는 의미로 "a fighter in every sense of the word"라고 찬양했습니다.

전 후 제 5군 사령관을 맡고 있던 월튼 H. 워커 중장은 1948년 맥아더 장군의 극동군 사령부 산하 일본 주둔 미 8군 사령관으로 임명됐습니다.

워커 사령관이 새 임지에 도착해 보니 미 8군은 여러 면에서 매우 부실했습니다. 2차 대전 후 미군 장병들에게 일본은 꿈의 근무지였습니다.

가정부들은 극히 적은 보수를 받으며 모든 일을 다 해 주었습니다. 바에는 밤 늦도록 숨과 음악이 있었습니다. 휴무때는 무료로 기차를 타고 다니며 모든 것을 즐길수 있었습니다.

부대 내에는 긴장감도 없었고, 훈련도 없었습니다. 장비도 크게 부실했습니다. 8군 전체에서 전투 경험이 있는 군인의 수는 10%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공했습니다. 이들은 불과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워커 중장에게 한국 주둔 미군의 지휘를 명령했습니다. 워커 장군은 미 8군 전 병력을 한국에 배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대구에 사령부를 설치했습니다. 워커장군에게 내려진 임무는 남하하는 북한군의 전진을 최대한 지연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유엔군도 도착하고 인천 상륙작전도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맥아더 사령관과 합동참모부는 북한군 즉 인민군이 허약해서 미군을 보기만 하면 도망할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워커 장군은 그같은 생각은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유엔군이 상륙하면서 미국의 탱크와 야포, 탄약, 기타 장비도 매일 도착했지만 그동안 8군은 여기 저기서 패전을 거듭했습니다. 대전이 북한군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대한민국 임시 수도가 되고 미 8군 사령부가 있는 대구도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사기가 떨어진 미군은 후퇴하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맥아더 사령부에서 더 이상 후퇴는 없다는 메시지가 날아오자 워커 장군은 장병들에게 그의 유명한 ‘지키던지 죽던지 Stand or Die…둘중 하나’라는 연설을 했습니다. 워커 장군은 ‘우리는 시간과 싸우고 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후퇴나 철수, 방어선의 재조정 따위는 없다. 더 이상 후퇴할 곳도 없다’라고 선언했습니다. 한국군을 만난 자리에서는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킬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미군과 한국군은 낙동강이라는 천연의 장애물을 사수해 북한군의 남하를 막고 다시 반격을 가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워커 장군은 서쪽으로 낙동강을 경계선으로 하는 폭 약 80 Km, 길이160 Km의 직사각형 부산 방어선을 그었습니다.

워커 중장은 전용기로 낙동강 일대를 수 없이 비행하며 강 주변의 구릉이나 계곡을 낱낱히 파악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즉각 결정을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려는 북한군은 화력을 집중해 8월 5일 낙동강 전선에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북한군은 밤에 수면 약 30 센티미터 아래에 가교를 설치하고 은밀히 강을 건너 방어선에 침투했습니다. 이들은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대구 북방 약 24 Km 까지 접근했습니다. 절대 더 이상의 후퇴를 하지 않으려는 워커 장군은 한국군의 백선엽 장군과 함께 싸웠습니다.

북한군은 밤이 되면 탱크로 미군 쪽으로 통하는 길에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미군의 바주카 포는 선두에 있는 탱크를 폭파했습니다. 그러면 북한군은 되돌아 갔다가 다음날 밤 다시 공격을 해 왔습니다. 낮이 되면 미 공군기들이 저공비행을 하며 북한군을 공격했습니다.

유엔군 진지로 파고들지 못한 북한군은 고지를 돌아 침투하려 했으나 공군기의 끊임없는 공격으로 대구에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8월이 거의 다 간 즈음, 일본에 있는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마무리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해병대와 육군 보병부대, 그리고 대규모 해군 함대로 구성된 새로운 10군단을 구성했습니다.

이를 안 북한군은 서둘러 부산을 점령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9월 초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 5군데에서 맹렬한 공격을 가해, 대구 북쪽 인근 산악지대로 접근했습니다. 워커 장군은 해병대가 인천상륙작전을 준비중임을 알고 있었지만 급한 상황에서 도꾜 사령부에 지원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미국에서 허용받은 군사력을 대부분 인천상륙작전에 집중한 맥아더 장군은 해병대 사용을 허락하기는 했지만 그 기간은 불과 3일 뿐이었습니다. 그 3일 동안 해병대는 적에게 반격을 가했지만 그들은 마지막 날인 9월 6일, 밤 자정이 되자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해병대 지원이 끊낀 워커 장군에게 남은 군대로는 현재까지의 북한군 저지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사나운 개 불독이라는 별명을 가진 워커 중장은 그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방어선을 지켜냈습니다. 미숙한 장병들을 이끌고 외롭게 싸운 그는 결국 낙동강 방어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때까지 시간을 버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됐습니다. 한반도의 허리를 장악한 이 작전은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북한군은 인천 상황을 즉각 통보받지 못하고 부산 방어선 공격을 계속했습니다. 북한군은 9월 23일이 돼서야 유엔군이 그들의 배후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미 8군과 10군단은 신속히 북진했습니다.

8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9월 28일 서울을 탈환했습니다. 10월 20일에는 그다지 큰 희생을 치르지 않고 평양을 점령했습니다. 10월 하순 워커 장군은 김일성이 사령부로 사용하던 자리에 자신의 사령부를 설치했습니다. 워커 군은 청천강까지 올라갔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가능한 가장 빠른 속도로 북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북진 도중 유엔군은 한국군 사단들로부터 강력한 중공군의 공격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워커 장군은 그같은 보고의 심각성을 깨닫고 이를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맥아더 사령관은 그 보고를 인정하지 않고 계속 북진하라며, 전쟁을 빨리 끝낼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북진하는 동안 8군은 사방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워커 군은 극심한 추위에다 부족한 보급, 끈질긴 중공군의 공격으로 큰 여려움을 겪었습니다. 워커장군이 중국과의 국경부근까지 도달하자 중공군은 강력한 공격을 가해왔습니다.

중공군의 수적인 우세 속에 전선은 다시 중부전선까지 밀려 내려왔습니다.

대부분 군 역사가들은 워커 장군이 분별있고, 올바른 판단으로 북한군 저지 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워커 장군은 상부에서 못마땅해 해도 필요할 때는 철수를 결정해 막대한 인명손실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도꾜 사령부에서는 워커 장군에 대한 비판이 일었습니다. 워커장군의 이의 제기가 옳은 것이었다 하더라도 맥아더 사령관과 그 참모진은 위신이 실추되는 모험을 감수하기 원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8군 사령관 교체가 거론됐습니다. 워커 장군은 자신을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뚝뚝하고 우직한 군인이었을 뿐입니다.

12월 23일, 워커 장군은 서울 인근의 부대 시찰에 나섰습니다. 당시 주한 19사단의 대대장으로 있던 그의 아들 샘 워커 중위는 그날, 이승만 대통령이 주는 은성무공훈장을 받는 날이었습니다. 워커 장군은 시찰을 가는 도중 아들 부대를 깜짝 방문하고 직접 훈장을 수여하려 했습니다. 운전병이 서둘러 경기도 양주를 달리는 도중 갑자기 한국군 트럭 한대가 그 앞에서 튀어나와 워커 장군 짚차의 측면을 들이받았습니다. 얼음으로 미끄러운 길에서 짚차는 전복되고 워커 장군은 사망했습니다.

워커 중장이 사망하자 8군의 사기는 떨어지고 그토록 어려운 싸움끝에 회복했던 땅을 중공군의 개입으로 대부분 다시 잃고 말았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매튜 릿지웨이 장군이 8군 사령관이 됐습니다. 워커 장군은 전쟁이 가져다줄 수있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기꺼이 책임을 짊어지는 무장이었습니다. 자신의 공적에 대해서도 절대로 과시를 하지 않았습니다.

워커 장군의 시신은 아들 샘에 의해 고국으로 돌아와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됐습니다. 그는 사후에1계급이 추서돼 4성장군이 됐습니다. 아들 샘도 한국전, 월남전, 유럽 등에서 복무하고 4성장군이 됐습니다. 미국 역사상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4성 장군이 된 경우는 이들 부자가 처음이었습니다.

전쟁과 인물에 대한 여러 저서를 남긴 찰스 프로빈스는 월튼 워커 장군이야말로 무능한 지휘체제로부터 희생양이 돼가며 한국을 구제한 잊혀진 영웅이라고 묘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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