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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세계 최고의 언론상을 제정한 신문왕, 조셉 퓰리처


[인물 아메리카] 세계 최고의 언론상을 제정한 신문왕, 조셉 퓰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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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미국의 언론과 예술 분야의 가장 큰 영광으로 꼽히는 퓰리처 상을 제정한 조셉 퓰리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퓰리처 상은 본래 뛰어난 언론인에게 수여되기 시작된 것이어서 기자들의 노벨상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뉴욕의 명문 컬럼비아 대학교가 관리하는 이 상은 헤밍웨이와 같은 위대한 작가나, 이오지마 전투에서 승리하고 성조기를 세우는 역사적 순간을 담은 보도 사진 등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낸 인물들에게 수여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권위있는 상을 제정한 인물은 항거리 태생의 신문왕 조셉 퓰리처입니다.

조셉 퓰리처는 1847년 4월 10일, 항거리 마코라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유한 유태인 계 가정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곡물거래상이었습니다.

조셉은 부다페스트에서 성장했고, 사립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는 가정교사도 따로 두고 공부했습니다. 나이가 17살이 되자 키가 1미터 80센티가 넘는 그는 오스트리아 군대에 지원했습니다. 그가 지원한 부대는 나폴레옹 산하의 외국 복무 부대로 멕시코나 인도의 영국군에서 복무하는 것이 임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나빠 입대가 거부됐습니다. 특히 시력이 나빴습니다. 그의 건강문제는 일생동안 그를 힘들게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때 남북전쟁 중이던 미국의 북부군, Union Army가 독일 함부루크에서 병사를 모집했습니다. 북부군은 유럽에서도 외인부대원을 모집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지원을 한 퓰리처는 배를 타고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퓰리처는 뉴욕으로 가 북군에 입대했습니다. 그 부대에는 독일계 군인이 많았습니다. 영어를 하지 못한 그는 독일어와 프랑스어는 유창하게 구사한 덕에 군 복무에 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군 복무를 마친 퓰리처는 미국 중부 도시인 센트루이스로 갔습니다. 그곳에서는 쓰레기 청소부, 식당 웨이터 등 각종 허드렛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시가 운영하는 도서관에 가 영어와 법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퓰리처의 새로운 운명은 우연히 도서관 휴게실 장기두는 데서 시작됐습니다. 퓰리처는 어떤 두 사람이 장기 두는 것을 보면서 여러가지 훈수를 해주었습니다. 장기 꾼들은 그 지역의 독일어 일간지 베스틀리체 포스트 (Westliche Post)의 편집인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결국 퓰리처가 그 신문사 기자로 들어가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는 신문사에 들어가자 날카로운 비판과 지칠줄 모르는 취재와 폭로 기사 등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입사 4년후인 1872년, 퓰리처는 거의 파산지경에 이른 신문사 사장으로부터 회사를 인수할 생각이 없느냐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퓰리처는 인수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나이 겨우 25세인 그는 갑자기 신문사 사주가 됐습니다. 그후 퓰리처는 예리한 사업가적 센스로 회사를 키워 나갔습니다. 그는 1878년 저명한 센트루이스 포스트 디스패치 (St. Louis Post-Dispatch)신문까지 합병했습니다. 이로써 퓰리처는 미국 저널리즘계의 떠 오르는 스타가 됐습니다.

그해 초 퓰리처는 워싱턴의 소문난 사교계 여성 케이트 데이비스(Kate Davis)와 결혼했습니다. 미국 시민권도 받았습니다. 한때 센트루이스 빈민가의 방랑자였고 천대받던 이민자는 이제 완전히 탈바꿈을 했습니다. 영어를 뛰어나게 잘한 그는 신문 편집인 뿐 아니라 인기있는 강사이자,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옷은 우아하게 입고, 붉은 갈색 수염에 동그런 안경을 낀 그는 쉽게 센트루이스 엘리트 사교계의 유명인사가 됐습니다. 고급 파티장에서 춤을 추고 공원에서는 말을 탔습니다. 그러나 그런 화려한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센트루이스 포스트 디스패치 사주가 되면서부터는 이른 아침부터 밤을 새우듯이 자리에 앉아 일에 몰두해야 했습니다. 독자들에게 자신의 신문이 업계의 챔피언이라는 점을 들어내기 위해 퓰리처는 탐사기사에 집중하고, 정부의 부패, 탈세하는 부호들, 도박꾼들의 비리를 폭로했습니다. 그같은 인기몰이는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구독자수가 늘어나고 신문사는 번창했습니다. 그가 후에 설립한 퓰리처 상도 다른 어떤 분야보다 부패를 폭로하는 탐사분야에 많이 수여됐습니다.

쉴새없는 신문사 일로 그의 건강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시력도 악화됐습니다. 의사는 퓰리처 내외에게 유럽으로 휴양을 가도록 권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럽행 기선에 오르는 대신 재정난을 겪고 있는 뉴욕 일간지 더 월드 (The World) 매입작업에 집중했습니다. 퓨리처는 매입한 월드지의 편집 방향, 내용, 신문의 형태 등에서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포스트 디스패치 판매부수 증가를 가져온 앞서의 기술을 여기에도 적용했습니다. 그는 공공기관이든 민간분야든 부패는 철저히 공격하고 신문 지면을 센세이셔널한 내용들로 가득 채웠습니다. 풍자 만화와 그림도 풍부하게 실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신문이란 부유층에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보통사람들에게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주는 미디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빈손으로 미국에 와 밑바닥에서 살았던 퓰리처는 보통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주어 그들이 그늘에서 나오도록 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 내주는 일이 자신이 가야할 운명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퓰리처는 신문의 홍보를 위해 뉴욕 항 자유의 여신상 받침대 건설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당시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자유의 여신상은 배에 실린채 세워질 장소가 결정되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재정난이 심각해 여신상 받침대를 건설하기 어려운 처지였습니다. 1885년 연방하원으로 재임 중이기도 했던 퓰리처는 자신의 신문 더 뉴욕 월드를 통해 모금활동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 10만 딜러가 넘는 성금을 모아 1886년 10월, 뉴욕항에 여신상을 세울수 있게 했습니다.

그같은 경영으로 퓰리처의 더 월드 지는 그후 약 10년 동안 발행부수 60만이라는 미국내 최대 규모의 신문으로 군림했습니다. 그러나 퓰리처에게 예상치 못했던 난관이 닥쳤습니다. 더 월드의 성공에 불만을 갖던 더 선(The Sun) 신문의 발행인 찰스 앤더슨 다나(Charles Anderson Dana)가 퓰리처를 자신의 인종과 종교를 거부한 유대인이라며 인신공격을 가해왔습니다. 더 월드 지를 뉴욕의 유태계 사회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공격이었습니다. 이 시련을 겪는 동안 퓰리처의 건강은 더욱 악화됐습니다.

나이 43세이던 1890년, 그는 더 월드지의 편집 업무를 일체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다시는 보도실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실명상태가 된 그는 극도의 우울증에도 빠져들었습니다. 심한 우울증은 소음을 견디지 못하게 했습니다. 때문에 그는 생애 마지막 약 20년 동안을 뉴욕에 있는 대 저택이나 메인주의 항구에 정박한 요트 리버티 호 내 방음장치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자주 여행을 다녔습니다.

퓰리처는 기사 편집에서는 손을 떼었지만 신문의 편집방향과 회사의 운영방침은 꼼꼼히 챙겼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영에 관한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약 2만자나 되는 이름과 암호를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1896년에서 98년 사이 그는 새로운 신문업계의 강자 랜돌프 허스트와 치열한 구독자 쟁탈전을 벌여야 했습니다. 양측 모두 어떤 제약도 받은바 없이 지나치게 자극적, 편향적, 허구성 기사를 남발했습니다. 이른바 옐로우 저널리즘, 황색언론이 등장한 것입니다.

쿠바에서 스페인 통치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을 때 풀리처와 허스트는 스페인에 대한 분노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데 치열한 경쟁을 벌였습니다. 옐로우 저널리즘을 일으킨 퓰리처는 그러나 차츰 자제를 하고 여러 이슈에 대해 진지하고 영향력 있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역사가은 퓰리처의 황색언론이 공공 서비스에 대한 그의 기여로 지탄을 면하게 된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그는 신문을 통해 정부와 기업의 부패를 용감하게 폭로하고 그같은 행위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에 성과도 냈습니다. 미국에서 독점 금지법이 만들어지고 보험업계의 규제를 강화하게 한데는 특히 그의 기여도가 높았습니다.

1909년 더 월드 지는 미국이 프랑스-파나마 운하회사에 4천만달러의 부당한 자금을 전달했다는 사실을 폭로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과 은행가 JP 모건 등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퓰리처를 기소함으로써 그같은 보도에 강력한 압박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퓰리처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법원은 퓰리처에 대한 불기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사건은 언론자유의 승리라는 중대한 판결을 이끌어 낸 것이었습니다.

퓰리처는 ‘국가와 언론은 그 흥망이 하나로 연결돼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같은 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으로 퓰리처는 언론대학 설립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유산을 콜럼비아 대학교에 기증해 언론대학을 설립하도록 했습니다. 아울러 그곳에서 퓰리처 상 제도도 운영하도록 했습니다.

몸이 허약한 퓰리처는 1911년 자신의 요트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 다음해 콜럼비아 언론대학이 정식으로 설립되고 1917년부터 퓰리처 상이 수여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퓰리처 상은 탐사보도, 논평, 보도 사진 등 저널리즘 14개 분야, 소설, 시, 전기류 등 문학 6개 분야, 음악 1개 분야에 수여되고 있습니다. 비 정기적으로 특별 공로상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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