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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한국을 사랑한 한국전의 영웅, 제임스 밴 플리트


[인물 아메리카] 한국을 사랑한 한국전의 영웅, 제임스 밴 플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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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는 제 2차 세계대전과 한국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특히 한국 전쟁에서는 사랑하는 외아들을 잃으면서도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최선을 다했던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밴 플리트는 1892년 3월 19일, 뉴저지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정식 이름은 제임스 올워드 밴 플리트였습니다. 아버지는 남북전쟁 때 북군에서 싸운 윌리암 밴 플리트, 어머니는 메도라였습니다. 할아버지 조수와도 독립전쟁에서 민병대에 들어가 싸운 분이었습니다. 제임스가 아직 어린 아기였을 때 가족은 철도 사업을 하기 위해 플로리다로 이주했습니다. 유년 시절을 그곳에서 보낸 제임스는 바토우에 있는 고등학교, 서머린 Institute를 졸업하고 1911년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그는 평범한 생도였습니다. 그러나 4학년 때는 학교 미식 축구 대표팀의 풀백을 맡아 무패의 기록을 남길 만큼 탁월한 선수였습니다. 그는 1915년 168명의 동기생 중 92등으로 육사를 졸업했습니다. 그 해에 같이 졸업한 동기들 중에는 5성 장군 아이젠하워, 4성 장군 오마 브래들리, 그리고 4성 장군 밴 플리트 등, 장성들이 많이 나와 별이 쏟아진 학번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보병 소위로 임관된 밴 플리트는 1916년 긴장이 감도는 멕시코 국경 근무를 거쳐 캔사스 주 임시 장교 양성소에서 교관으로 일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중 그는 기관총 훈련 과정을 마치고 유럽 원정군으로 프랑스에 배치됐습니다.

대위로 승진한 밴 플리트는 미군 6사단 제 17 기관총 대대장으로 임명됐습니다. 그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1918년 10월, 뮤즈-아르곤 지역에서 부상을 입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기 불과 며칠 전이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평화시가 되자 밴 플리트는 미국내 여러 대학의 학군단 단장을 역임했습니다. 특히 플로리다 대학교에서는 한군단장과 함께 대학 풋볼팀 코치도 겸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파나마 운하를 경비하는 제42보병연대의 대대장을 지냈습니다. 이처럼 평화시 여러 직책을 두루 맡았던 밴 플리트는 1941년 대령으로 제8보병연대 연대장이 됐습니다. 밴 플리트 대령의 제8보병연대는 영국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앞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미군 내에는 같은 이름을 갖고 있으면서 음주로 상관의 신용을 잃은 같은 급의 장교가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밴 플리트는 상부에서 두 사람을 혼동하는 바람에 진급이 늦어지는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밴 플리트는 술을 한 모급도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밴 플리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여하는 4군단 예하의 제8 보병연대를 지휘했습니다. 이때 밴 플리트 대령의 능력을 알고 있던 브래들리 군단장은 그를 D-데이에 오마하 비치에 상륙하는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밴 플리트는 뛰어난 지휘 능력을 과시하며 소수의 희생으로 해안에 상륙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밴 플리트는 별을 달게 됐고 미 제2사단의 부사단장이 됐습니다. 90사단이 창설되자 브래들리 장군은 주저없이 밴 플리트를 사단장으로 선택했습니다. 소장으로 진급한 밴 프리트 장군은 2차 대전 말기 3군단을 지휘하게 됐습니다. 그는 1945년 2월 4일부터 3월 15일까지 미군의 선봉 부대로 라인강을 건너는 레마겐 교두보 돌파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이어 패튼 장군이 지휘하는 독일 남부 소탕작전에서 맹활약을 벌였습니다.

그의 병력은 유럽전선의 막바지에 선봉으로 독일을 가로질러 나갔으며, 2차대전 최후의 날에는 이미 오스트리아령 알프스에 발을 딛고 있었습니다. 패튼 장군은 90사단과 3군단 사령관 때의 밴 플리트의 활약을 보고 자신의 휘하 장군들 중 가장 뛰어나다고 극찬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밴 플리트 장군은 유럽 주둔 미군 부사령관에 임명됐습니다. 밴플리트 장군은 그리스 군의 훈련과 정치적 안정화에 노력했습니다. 이어 미국으로 돌아온 밴 플리트 장군은 미 제1군단장을 맡았습니다.

밴 플리트 장군이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건, 1951년이었습니다.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한국전쟁을 지휘하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전쟁확대를 주장해 워싱턴과 갈등을 빚은 끝에 해임됐습니다. 그리고 새 유엔군 사령관에는 매튜 릿지웨이 중장이 임명됐습니다. 밴 플리트 중장은 릿지웨이 중장이 맡고 있던 주한 미 8군 사령관직을 넘겨받게 된 것입니다. 밴 플리트 중장은 1951년 4월 14일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공산군이 2차에 걸쳐 전면 공세를 가하기 직전이었습니다. 밴 플리트 장군이 도착하자 거의 즉각 유엔군을 향한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벌어졌습니다.

한국군 제3군단이 중공군의 포위 공격으로 붕괴돼버린 상황에서 밴 플리트 장군은 노련한 방어전술로 중공군의 서울 재점령 시도를 막아냈습니다. 밴 플리트는 미군 포병의 탄약 보급률을 5배로 늘려 무제한 포사격을 퍼부었습니다. 적군 위치를 초토화하는 작전으로 그는 끝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을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밴 플리트 중장은 이때의 뛰어난 전공으로 대장으로 승진했습니다. 한 달 후 밴 플리트는 유엔군에게 철의 삼각지대를 향한 북진을 명령했습니다. 그의 작전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상부로부터 공격 이전의 위치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하달됐습니다. 당시 공산군은 평화회담을 제안했고, 트루먼 대통령은 그에 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전협정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극력 반대하고 있었고, 밴 플리트 장군의 생각도 그와 같았습니다.

양측 군대는 정전협상이 종결되기 전까지 한치의 땅이라도 더 점령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1951년 늦여름, 밴 플리트는 여러 건의 소규모 공격 작전을 전개해, 단장의 능선, 피의 능선 등을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가을이 되자 다시 상부로부터 더 이상의 모든 공격을 중단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교착상태에 빠진 정전회담이 다시 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밴 플리트 군은 극히 소규모의 제한적인 공격만 할 수 있었습니다.

장군은 갈수록 불만이었습니다. 그같은 소극적인 공격으로는 군의 사기도 떨어질 뿐만 아니라, 군대의 안전을 지킬 탄약조차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의회 청문회에 출석했을 때 전력을 다해 공산군을 물리치려는 자신의 노력이 워싱턴에서 저지당하고 있다고 폭로했습니다. 또한 한국군을 훈련시켜 전투에 투입시키려 노력도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미 국방부는 이에 대해 그러한 계획을 억제한 일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밴 플리트 장군은 한국의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미군 교관들을 동원해 여러 지역에서 한국군 신병을 훈련시켰습니다.

이런 가운데 밴 플리트 장군에게는 비극적인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미 공군 소속으로 역시 한국전에 참전 중이던 외아들 제임스 밴 플리트 대위가 1952년 4월 B-29 폭격기를 몰고 북한 지역에서 야간 공습 임무를 수행하다 실종됐다는 것입니다. 미군은 1954년 실종된 제임스 대위를 사망으로 처리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이 끝난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밴 플리트 대위는 중공군에 포로가 돼 러시아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정전협상은 2년이나 끌다가 1953년 7월 23일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나중에 밴 플리트 장군은 미 상원 군사위원회 증언에서 그때 유엔군이 공격을 계속했으면, 한국전은 승리했을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정전협정이 체결되기 전인 1953년 1월, 8군 사령관직을 맥스웰 테일러 중장에게 넘기고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밴 플리트 대장은 군 생활 38년 만에 61세로 현역에서 물러났습니다.

해리 트루먼 전 대통령은 밴 플리트 장군이 퇴임하자, ‘나는 그를 그리스로 보냈다. 그는 승리했다. 나는 그를 한국에 보냈다. 그는 거기서도 승리했다. 그는 내가 가진 최고의 지휘관이었다’고 찬양했습니다. 1954년 미국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밴 플리트 장군이 한국 청년들을 훈련시켜 한국 전선의 3분의 2 이상을 담당하고 있다면서, 그래서 한국인은 밴 플리트 장군을 '한국군의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말했습니다.

밴 플리트 대장은 3개의 Distinguished Service Cross, Purple Heart를 포함해 수많은 훈장과 메달을 받았습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전역 후 부동산 회사를 운영했습니다. 20세기 폭스사 등 유명 기업체들의 최고 경영진에도 참여했습니다. 1957년에는 코리아 소사이어티를 설립하는데도 깊이 관여했습니다. 밴 플리트 장군은 1992년 9월 23일, 플로리다 주 목장에서 100회 생일을 보낸지 약 6달 후 타계했으며,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됐습니다.

큰 키에 파란 눈의 4성 장군은 오랜 군 생활 내내 최 말단 일등병에게까지도 자상한 배려와 인격 존중의 태도로 병사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밴 플리트 장군은 평소 '나는 절대 위압적으로 지휘를 하기 원치 않았다. 나는 권한을 남용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권한이란 친절한 방식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그를 흑백이 분명한 무장이자 덕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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