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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미국 독립운동에 불을 지핀 사상가, 토마스 페인


[인물 아메리카] 미국 독립운동에 불을 지핀 사상가, 토마스 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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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7월 4일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기까지는 정치인, 군인, 학자, 일반 국민 등 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 중에는 팔플렛이라 불리우는 조그마한 책자로 주춤거리던 독립운동에 열화같은 에너지를 불어 넣은 토마스 페인도 있습니다.

토마스 페인은 1737년 영국 노포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적 그는 초등학교를 다녔으나 읽기, 쓰기, 기초적인 수학을 할수 있는 정도였고 그 이상의 정식 교육은 받지 못했습니다.

13살때는 조끼를 만드는 아버지 밑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후 여러 직업을 전전했지만 자리를 잡지 못하다 세금 징수원이 됐습니다. 술과 담배 밀매업자들을 적발하고 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일이었습니다.

수입이 적어 생활에 쪼들리면서도 그는 늘 책과, 과학 기재들을 구입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거듭되는 실패를 맛보아야 했습니다. 두차례의 결혼도 얼마 가지 않아 파탄이 났습니다. 직업도 모두 실패하거나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35살때는 세금징수원의 임금을 올려주어야 부패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글을 썼다가 그 자리에서도 쫓겨났습니다.

진짜 희망이 없다고 좌절하고 있을 때 페인은 런던에서 미국인 벤자민 프랭클린을 만납니다. 페인은 미국에 와 살아보라는 프랭클린의 제의를 받아들여 1774년 미국 동부 필라델피아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고 프랭클린 집안의 소개로 펜실배니아 매거진이라는 잡지사에서 일을 하게 됐습니다. 페인은 여기서 가명으로 많은 글을 썼습니다.

그가 쓴 글중 하나로 미국의 흑인 노예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흑인 매매에 대해 정의와 인간성에 반한다는 통렬한 비판이었습니다.

페인은 1775년 4월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자, 미국은 영국의 세금제도에 항의하는데 그치지 말고 아예 독립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토마스 페인의 그런 생각은 유명한 그의 저서 상식론, 즉 (Common Sense)에 반영됐습니다. 50쪽 짜리, 작은 책, 팜플렛이라고 불리우는 이 책은 1776년 1월 10일 출판됐습니다.

이 책은 불과 3개월 만에 12만부, 1년 만에 무려 50만부나 팔려 나갔습니다. 단일 출판물로서는 어떤 것보다 많은 판매 기록이었습니다. 이 책은 미국이 1776년 7월 4일 독립을 선언하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책은 아직도 독립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로 우와좌왕하던 미국인들에게 독립의 당위성을 확실하코 명쾌하게 제시해주었습니다. 페인은 이 책에서 영국의 군주·귀족 전제정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상식에 어긋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공화제만이 미국이 갈 길이라고 역설했습니다. 또 미국은 영국인의 나라가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온 이민자들의 나라라는 것, 영국에 복속된 상태에서는 미국이 뛰어난 역량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 독립으로 미국이 누릴 수 있는 각종 이익에 대해 미국인들의 가슴에 와 닿는 말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 체제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혁명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페인은 1776년부터 1783년 사이에 16회 연재로 쓴 미국의 위기(The American Crisis)에서 식민지인들의 독립정신을 더욱 고취시켰습니다. 이 글의 서두는 미국 혁명기간 중 가장 읽는 사람의 피를 끓게 하는 문장들로 돼 있었습니다.

“폭군이란 지옥처럼 정복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단결해 있다. 투쟁이 어려울수록 승리는 더욱 영광스러운 것이다. 너무 값싸게 얻으면 존귀함도 가벼워진다.”
이 글과 함께 뒤이은 워싱턴 군대의 트렌튼 전투 승리는 군인들의 사기를 크게 올리는 효과를 냈습니다. 곧 제대를 앞두고 있는 많은 군인들조치도 이글을 읽고 재복무를 지원하는 현상도 벌어졌습니다.

미국이 정식으로 독립을 선포한 다음 해인1777년, 대륙회의는 페인을 외교위원회 서기로 임명했습니다. 페인은 자신의 봉급에서 500 달러를 떼어내 군인들을 위한 보급품 지원 운동을 벌였습니다.

혁명이 끝나면서 페인은 다시 빈곤에 시달렸습니다. 그의 애국적인 저서들은 그렇게 많이 팔렸지만 금전적 이익을 전혀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책 값이 싸야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다는 신조 때문이었습니다.

페인은 발명에 몰두했습니다. 그리고 교각이 없는 다리, 연기 안나는 초 등을 연구했습니다. 1787년 4월 페인은 필라델피아 근처에 다리를 건설하는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유럽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영국에 가서는 프랑스 문제를 놓고 영국 정치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와 논쟁을 벌였습니다. 보수진영의 지성인 버크는 프랑스 혁명론에서 혁명을 추진하는 프랑스인들을 비판했습니다.

혁명을 지지하는 페인은 이에 분개해 인간의 권리(Rights Of Man) 라는 글로 반박했습니다. 이 소 책자는 나오자마자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영국 급진주의 운동의 핵심 문헌이 된 이 책은 미국에서도 광범위하게 읽혔습니다.

페인은 군주제 대신 공화제를 강력히 주장하면서, 국가란 국민의 복지를 위해서 수립되어야 하며 그 역할조차도 불필요한 상황이 조성된다면 국가를 폐지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했습니다.

집권층에게 페인의 주장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폭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정부는 책의 판매를 금지하고, 출판업자는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페인은 반역죄로 기소되고 체포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페인은 프랑스로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체포되지는 않았습니다. 프랑스에서는 혁명을 지지하는 그에게 명예시민권을 주었습니다.

페인은 그뿐 아니라 프랑스 국민의회의 헌법 제정 의원이 됐습니다.

페인은 프랑스에서 군주제 폐지를 열렬히 지지했지만 왕당파들에게 테러를 가하는 혁명세력의 행위에 대해서는 탄식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리고 국왕 루이 16세를 살리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결국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처형됩니다.

페인은 혁명세력에 의해 1973년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습니다.

그러나 극단적 혁명 지도자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면서 약 1년만에 풀려났습니다. 그가 옥중에 있는 동안 종교 문제를 다룬 이성의 시대(The Age of Reason)가 출판됐습니다.

페인은 이신론에 입각해 초월적인 존재를 믿는다는 점은 확실히 하면서도 제도적인 종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내놓았습니다. 이러한 주장으로 페인은 정교도들로부터 무신론자라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페인은 1802년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도착하자마자 페인은 나라에 대한 자신의 봉사는 모두 잊혀지고, 오직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무신론자로만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페인은 빈곤과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잦은 폭음은 그같은 고통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페인은 특권층과 종교적 미신을 계속 공격했습니다.

페인은 1809년 뉴욕 시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뉴욕 주가 독립운동에 대한 포상으로 제공했던 뉴 로첼의 농장에 안장됐습니다.

페인이 사망했을 때 일간지 뉴욕 시티즌은 ‘명이 긴 그는 선한 일은 조금했고 악한 일은 더 많이 한 사람’이라고 평하는 부고 기사를 실었습니다. 또 대부분 미국 신문들도 그 기사를 옮겨 실었습니다.

페인에 대한 그러한 인식은 사망 백년이 지나도 계속됐습니다. 그러나 점차 인식은 바뀌어 1937년 1월 30일, 런던의 ‘더 타임스’지는 그를 영국의 볼테르라고 평했습니다.
또 1952년 미국 뉴욕 대학은 페인의 반신상을 캠퍼스 내 명예의 전당에 세웠습니다. 미국 독립혁명의 아버지, 그가 복권되기까지는 참으로 긴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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