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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최초의 일본 공격에 앞장선 조종사, 지미 두리틀


[인물 아메리카] 최초의 일본 공격에 앞장선 조종사, 지미 두리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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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2차대전중 최초로 도쿄 폭격 작전을 감행해 미국인들에게 이길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해준 둘리틀 공습의 선봉장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2차 대전 중 최초로 도쿄 폭격 작전을 감행해 미국인들에게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해 준 둘리틀 공습의 선봉장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는 한때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비행을 한 기록 보유자였습니다. 그는 미국을 최초로 24시간 내에 비행한 조종사였습니다. 그는 일명 블라인드 비행을 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블라인드 비행이란 관제소나 레이더 같은 것이 없이 오직 비행기 자체의 기능만으로 하늘을 날았다는 의미입니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그는 최초로 적국에 대한 공격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제임스 해롤드 두리틀이었습니다. 많은 미국인들은 그를 지미, 또는 지미 두리틀이라 불렀습니다.

지미 두리틀은 1896년 12월 14일,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족은 지미가 어렸을 때 알래스카 놈(Nome)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어린 지미는 체구가 작았습니다. 그러나 덩치 큰 아이들이 작은 그를 얕잡아보고 싸움을 걸었다가 호된 곤욕을 치르곤 했습니다. 지미는 키는 작았지만 싸움에서 져본 적이 없는 아이였습니다. 그는 권투를 배웠습니다. 십 대가 되자 그는 자기 체급에서 미국 서부 챔피언까지 차지했습니다. 지미는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 들어가 광물공학을 전공했습니다. 대학 재학 중 그는 라이트급과 미들급 대학 복싱 챔피언이 됐습니다. 그 후에는 매사추세츠 공대에서 항공분야의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지미 두리틀은 육군 항공대에 들어갔습니다. 1918년 비행학교를 졸업한 그는 프랑스 전선에서 싸우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군에서는 그를 조종사 훈련 교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전쟁이 끝났지만 지미는 자진해 군에 그대로 머물렀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조종술을 더 숙련하고 전공인 공학도 도 더 배울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해서였습니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 대부분 기간 지미 두리틀은 항공기 제작업계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새로운 항공기 시험 비행을 많이 했습니다. 그는 갈수록 장거리를 비행했습니다. 그러면서 세계적인 비행 경기에도 출전했습니다.

1920년대와 30년대, 비행 경기는 그때마다 새로운 기종의 시험장이 됐습니다. 지미 두리틀은 슈나이더 마린 컵, 벤딕스 트로피, 톰슨 트로피 등 3대 항공기 대회를 석권했습니다. 이때 그는 워낙 유명해져서 오늘날도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지미 두리틀이라는 이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시기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instrument flying 즉 계기 비행의 개발이었습니다. 항공시대 초기에는 기상이 나쁘면 비행을 할 수 없었습니다. 기상 악화로 많은 조종사들이 항로를 잃고 추락해 숨졌습니다. 안개가 짙게 끼면 조종사는 좌우 상하를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많은 조종사들과 항공전문가들은 그것이 해결 불가능한 분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미 두리틀은 조종장비 제작 기술자들과 공동으로 새로운 장비 개발에 나섰습니다. 이들이 만드는 기기는 항공기가 좌우 상하 어느 쪽으로 향하는가를 알려주는 계기, 항공기가 직선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는 장치 등이었습니다. 착륙할 장소를 찾도록 무선 통신과 연결하는 장치도 만들었습니다. 10개월 동안의 실험이 끝난 1921년 9월 24일, 그날은 짙은 안개가 끼어 지척을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이날 지미 두리틀은 나쁜 기상 조건에서도 비행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첫 조종사가 됐습니다. 지미는 이륙을 하고, 약 10분간 비행을 한 다음 무사히 착륙을 함으로써, 어떤 기상조건에도 안전한 조종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그 후 7개월 동안 일본은 아시아에서 승승장구했습니다. 많은 미국인들은 그런 일본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으며 미국 본토 서부가 최악의 위험에 빠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군부 지도자들에게 신속히 일본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작은 것이라도 일본에 이겼다는 소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일본은 태평양 서부 바다를 모두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공격도 일본이 장악하고 있는 영역을 깊이 파고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유일한 방법은 항공모함에 대규모 쌍발 폭격기 부대를 싣고 나가 공습을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때 미군이 사용할 수 있는 항공기로는 쌍발 엔진의 B-25 미첼 폭격기가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5명이 탈 수 있었습니다.

지미 두리틀은 처음부터 이들 항공기를 항공모함에 싣고 나가 출격을 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항공기들은 항공모함에서 뜰 수는 있었지만 공습을 하고 돌아와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내리기에는 활주로가 짧고 항공기가 너무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항공모함에서 이륙했다 일본을 공격한 다음 중국 땅 어느 곳에 착륙을 해야 했습니다.

이 계획은 극비에 부쳐진 채 진행됐습니다. 비행요원들조차도 전혀 몰랐습니다. 비행이 극히 어려운 것이라고만 들었을 뿐입니다. 작전 개시일, 샌프란시스코 부근 군항에서 16대의 항공기가 항공모함 호넷 호에 실렸습니다. 지미 두리틀은 비행사들에게 항공모함이 바다로 나간 뒤에서야 어디로 가는지를 발표했습니다. 계획은 항공모함이 일본 해안 650 킬로미터까지 접근하면 밤에 항공기가 날아가 일본을 폭격한 다음 아침에 중국 땅에 착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 짜인 계획이라도 어려움이 생기게 마련이었습니다. 1942년 4월 18일 아침 7시 30분, 항공모함은 계획보다 훨씬 먼 곳에서 일본 경비정에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일본 해안으로부터 1050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작전 계획은 서둘러 수정돼야 했습니다. 거리가 너무 멀지만 조종사들에게 출격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지미 두리틀이 가장 먼저 하늘로 치솟았습니다. 모두들 긴장 속에 그걸 지켜보았습니다. 항공모함은 거친 파도 때문에 가파르게 오르락내리락했지만 지미 두리틀은 아주 쉽게 갑판을 떠났습니다. 다른 조종사들도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항공모함은 비행기와 조종사들을 이별하고 서둘러 머리를 돌려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지미 두들리와 그의 편대는 일본을 향해 날았습니다. 각 비행기마다 특정 표적이 주어졌습니다. 대부분의 표적은 도쿄에 있었습니다. 요코하마와 나고야에도 표적이 있었습니다. 미국 항공기들은 싣고 간 폭탄을 모두 투하하며 성공적으로 표적을 공격했습니다.

폭격기들은 임무를 완수한 다음 전원 일본을 벗어났습니다. 그중 한대는 연료가 떨어져 소련에 불시착했습니다. 나머지 15대는 중국 내 비행장에 착륙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거리가 멀어 한대도 목표한 장소까지 갈 수가 없었습니다. 나아가 다들 연료가 떨어졌습니다. 모든 탑승자들에게 낙하산으로 탈출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저장성 타이저우 시 부근 상공이었습니다. 낙하산은 논과 산 이곳저곳에 떨어졌습니다. 그 결과 8명이 일본군에게 잡히고 나머지는 중국군 게릴라들의 도움으로 결국은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지미 두리틀과 그의 항공기 편대가 일본에 준 타격은 그리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전쟁 군벌들은 국민들에게 일본은 어떤 공격도 받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주지 시켜왔습니다. 그러나 지미 두리틀은 그들이 틀렸다는 걸 증명해 준 것이었습니다. 그 후 일본 군대와 항공기들에게는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돌아오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한편 미국에서는 두리틀의 일본 공습 소식이 전해지자 전 국민이 환호했습니다. 그것은 일본에 대한 최초의 승리의 소식이었습니다. 신문들은 두리틀과 그의 팀원들을 영웅이라고 찬양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지미 두리틀에게 미국 군이 수여하는 최고의 훈장인 영예 메달을 수여했습니다. 군 장교로 이 훈장을 받은 이는 그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는 장군으로 승진했습니다. 그 후에도 지미 투리틀은 전쟁 중 수많은 전투기와 폭격기를 지휘했습니다. 그가 지휘하는 공습은 많은 경우 적진 깊숙이 파고드는 것들이었습니다. 1959년 그는 공군 중장으로 전역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지미 두리틀은 정부와 민간의 여러 분야에 종사하며 나라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1989년 로날드 레건 대통령은 지미 두리틀을 대장으로 승진시키고 항공분야와 국가를 위한 기여로 대통령 자유의 메달을 수여했습니다. 과학자요, 비행선수이며, 항공기술의 개척자이고, 군 장성인 지미 두 리틀은 1993년 9월 27일, 96세로 타계해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됐습니다. 이 시간에는 2차 대전 중 최초로 일본 공습작전을 감행해 미국인들에게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해 준 지미 두 리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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