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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지적이고 독립적인 명 배우, 캐서린 헵번


[인물 아메리카] 지적이고 독립적인 명 배우, 캐서린 헵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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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 시간입니다. 7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영화와 연극 무대에서 가장 뛰어난 여배우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캐서린 호턴 헵번의 생애를 되돌아보겠습니다. 헵번은 80세가 넘을 때까지 긴 세월 동안 5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독립적이고 날카로운 지성을 겸비했으며 연기력 또한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난 배우였습니다. 캐서린 헵번은 아카데미 최우수 여우 주연상을 네 번이나 받아 그 상을 가장 많은 배우였습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 시간입니다. 노시창입니다.

이은경입니다. 이 시간에는 7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영화와 연극 무대에서 가장 뛰어난 여배우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캐서린 호턴 헵번의 생애를 되돌아보겠습니다.
헵번은 80세가 넘을 때까지 긴 세월 동안 5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독립적이고 날카로운 지성을 겸비했으며 연기력 또한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난 배우였습니다.
캐서린 헵번은 아카데미 최우수 여우 주연상을 네 번이나 받아 그 상을 가장 많은 배우였습니다. 이처럼 캐서린 헵번은 미국의 영화와 대중문화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 여성이었습니다.

캐서린 헵번은 미국 동부 코네티커트 주 하트포드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유하고 교육수준이 높은 집안이었습니다.
아버지 토마스 헵번은 명성 높은 의사였습니다. 어머니 캐서린 마사 호턴 (Katharine Martha Houghton)은 낙태권을 비롯해 여성의 권리를 주창하는 분이었습니다. 헵번 부부는 자녀들이 정치와 사회적 문제에 대해 높은 교양을 쌓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가족들간에도 서로 자신의 진보적 의견을 과감히 발표하곤 했습니다. 의사 헵번은 운동을 중시하는 분이기도 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캐서린 헵번은 운동을 잘하는 여성이 됐습니다. 특히 승마, 수영, 골프, 테니스 등을 잘했습니다.

헵번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한 영화에서 가족이 자신을 이상한 아이가 아니라 두려움 없는 아이로 가르쳤다고 말했습니다.

[HEPBURN Act]
“I don't think I'm an eccentric, no! I'm just something from New England that was very American and brought up by two extremely intelligent people…”

“나는 자신을 괴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절대 아니에요. 나는 그저 대단히 미국적인 동부 지방 사람으로 성장했고, 아주 지적인 두 분에게서 일종의 인생 최대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건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캐서린은 1928년 펜실베이니아의 명문 브린마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 후 머지않아 뉴욕 브로드웨이의 무대에서 조그마한 역할을 맡으면서 배우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졸업하던 해에는 루들로우 옥든 스미스와 결혼했습니다. 이들의 결혼 생활은 두 해 만에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캐서린은 나중에 루들로우의 지원이 자신의 초기 생애에 매우 중요했다고 고백했습니다.

헵번은 보통의 여배우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헵번은 몸이 가냘프면서도 근육이 있었습니다. 말씨는 동부지방 억양이 강했습니다. 생각과 행동도 매우 독자적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여자들이 스커트나 드레스를 입던 시대에 헵번은 바지를 입었습니다. 때로는 그녀의 독립적이거나 진보적인 견해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헵번은 그 후 RKO라는 영화사와 출연계약을 맺었습니다. 그의 첫 영화는 1932년에 나왔습니다.

다음 해에는 영화 모닝 글로리(Morning Glory)에 출연했습니다. 헵번은 이 영화에서 에바 러브레이스 (Eva Lovelace)역을 맡았습니다. 성공을 위해 무대에서 싸우는 여배우 역이었습니다. 감독들은 헵번의 연기에 별다른 감동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헵번은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해 대 스타로 올라섰습니다.
이 영화로 헵번은 첫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받았습니다. 영화 속의 에바는 유명한 여배우가 되기 위해 이름까지 바꾸었다고 말합니다. 대단히 빠른 헵번의 말은 뒤에 숨어있는 에너지를 느끼게 해줍니다.

[KATHARINE HEPBURN IN "MORNING GLORY"]
I hope you're going to tell me your name. I want you for my first friend in New York. Mine's Eva Lovelace.

1930년대 영화 비평가들은 헵번에게 찬사도 보내고 비판도 했습니다. 일부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 말투를 가졌다고 비평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헐리우드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헵번은 헐리우드라는 무대를 자신의 방식대로 대했습니다. 그녀는 강한 개성을 지닌 인물 역을 맡기 좋아했습니다. 다른 여배우처럼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화장도 다르게 하고, 사진사들이 섹시한 모습을 찍도록 허락하지도 않았습니다. 미디어를 통해 팬들과 대화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캐서린 헵번은 열심히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말까지도 그녀는 대중들의 인기를 끌지 못했습니다. 어떤 제작자들은 그녀를 출연시키지 않았습니다. 쉽게 포기하지 않는 헵번은 뉴욕의 브로드웨이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헵번은 브로드웨이에서 “필라델피아 이야기” (The Philadelphia Story)라는 연극에 출연했습니다. 헵번의 친구 필립 배리 (Philip Barry)가 특별히 그녀를 위해 극본을 썼습니다. 이 연극은 돈 많고 아는 것이 많은 트레이시 로드(Tracy Lord) 라는 여성의 이야기였습니다.

이 여성은 사랑하지도 않는 한 남성과 결혼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성은 영화에서 자신과 사람들에게 좀더 솔직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항상 사랑했던 과거의 다른 남성과 결혼하기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이 연극은 대성공이었습니다. 헵번은 즉시 이 작품의 법적 소유권을 샀습니다. 헵번은 이 연극이 반드시 영화로 만들어질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반드시 그 영화의 주인공이 돼야 한다는 조건을 확실히 해두었습니다.

1940년 드디어 “필라델피아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져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헵번은 다시 한번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필라델피아 이야기”의 한 장면. 주인공 트레이시 로드가 새로운 친구인 작가 매콜레이 카너를 만나는 대목입니다. 트레이시는 이제 막 친구의 책을 읽고 그가 큰 인물이라는 데 놀라고 있습니다.

[영화 컷]
Tracy: These stories are beautiful! Why Connor, they're almost poetry!
Macaulay: Well, don't kid yourself, they are.
Tracy: I can't make you out at all now.
Macaulay: Really? I thought I was easy.
Tracy: So did I. But you're not. You talk so big and tough, and then you write like this. Which is which?

1942년 캐서린 헵번은 “올해의 여성”(Woman of the Year)에 출연했습니다. 이 영화는 남자배우 스펜서 트레이시와 함께 출연한 9편의 영화 중 첫 번째였습니다. 두 사람은 영화에서도, 실생활에서도 소문난 짝꿍이었습니다. 그러나 둘이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것은 일반 대중에게 철저히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이들이 출연한 영화는 대부분 성격이 강한 두 사람 사이의 균형 문제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헵번과 트레이시는 함께 출연할 때 마술 같은 에너지를 만들어 냈습니다.

스펜서 트레이시는 다른 여성과 결혼했습니다. 그는 종교적 이유로 부인과 이혼할 수 없어, 헵번과 20년 이상 비밀리에 사랑을 나누었으면서도 함께 살지 못했습니다. 헵번은 한때 다른 남성을 사랑한 적도 있었습니다. 즉 유명한 거부 하워드 휴즈였습니다. 그러나 생애 내내 사랑을 유지한 남성은 스펜서 트레이시였습니다.

헵번의 가장 유명한 연기 중 하나는 “아프리카의 여왕”( The African Queen)입니다. 헵번은 1951년 유명한 남자 배우 험프리 보가트와 함께 이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이들은 아프리카 중부 지역 강에서 배를 타며 아주 다른 성격을 가지고도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엮어가고 있습니다.

캐서린 헵번은 연륜이 쌓이면서 더욱 현명하고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을 묘사하는 연기를 많이 했습니다. 1967년 헵번은 마지막으로 스펜서 트레이시와 함께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한국에서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알려진 Guess Who's Coming to Dinner였습니다. 이 영화 촬영 후 수주 만에 트레이시는 사망했습니다. 이 영화로 헵번은 두 번째 아카데미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그다음 해에는 “겨울의 사자” (A Lion in Winter)로 세 번째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헵번은 70대 중반에 출연한 “황금연못” (On Golden Pond)으로도 아카데미 상을 받았습니다.

80대에 들어서서도 헵번은 계속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이때는 여러 편의 영화 외에 텔레비젼 드라마에도 출연했습니다. 자서전을 비롯한 여러권의 책도 냈습니다. 캐서린 헵번은 2003년 96세로 타계했습니다. 그녀의 유언대로 모교인 브린마 대학에는 캐서린 휴턴 헵번 센터가 설립됐습니다. 이곳에는 영화, 극장, 여성의 권리, 시민의 책임 등 그와 관련된 많은 자료들이 소장돼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70년에 가까운 오랜 세월 여배우로 활동하면서 미국 영화와 연극 무대의 가장 뛰어난 배우 중의 한 사람으로 찬사를 받은 캐서린 헵번의 생애를 살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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