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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여자 스포츠의 세계를 바꾼 두 여성, 케이 요우, 베티 제임슨


[인물 아메리카] 여자 스포츠의 세계를 바꾼 두 여성, 케이 요우, 베티 제임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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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 이 시간에는 여자 스포츠의 세계를 바꾸어 놓은 두 여성 케이 야우와 베티 제임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 이 시간에는 여자 스포츠의 세계를 바꾸어 놓은 두 여성 케이 야우와 베티 제임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샌드라 케이 야우는 1942년 노스캐롤라이나주 깁슨빌 (Gibsonville)에서 태어났습니다. 샌드라 케이 야우는 아버지 힐튼 야우와 어머니 리브 야우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 부터 농구를 좋아했습니다. 케이 야우는 이스트 캐롤라이나 대학교에서 영어를 전공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하이포인트 (High Point)라는 곳에 있는 제이 앨런 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사, 도서관 사서, 여자 농구 코치 등을 했습니다.

1971년 케이 야우는 대학 스포츠 코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노스캐롤라이나주 엘런 대학에서 여자 스포츠 감독과 농구 코치를 담당했습니다. 4년 후 케이 야우는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의 풀 타임 농구 코치로 스카웃 됐습니다. 이 대학교에 풀타임 여자 농구 코치가 임명된 것은 야우가 처음이었습니다. 야우는 이 대학의 여자 배구, 여자 소프트볼 코치도 겸했습니다.

야우는 여자 농구 코치로써 뛰어난 역량을 보였습니다. 1981년 야우는 여자 국가대표팀을 코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농구팀은 세계 대학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차지했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 야우는 세계 친선 올림픽과 FIFA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미국 여자 농구팀 코치로 활약했습니다. 이 두 대회에서 미국팀은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1981년 케이 야우는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여자농구 코치 협회 WBCA를 창설했습니다. 그리고 그 협회의 회장이 됐습니다. WBCA는 모든 단계의 여자 농구에서 코치들을 단합하고 어린 소녀들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의 여자 농구를 발전시키자는데 있었습니다.

1987년 케이 야우는 자신이 유방암에 걸린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케이 야우는 건강문제로 코치와 책임자로서의 역할을 소홀히 할 수 없었습니다. 유방암 발견 10개월 후 케이 야우는 미국 여자 농구팀을 맡아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케이 야우는 농구에 대한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것으로 잘 알려졌습니다. 그녀는 나이스미스 기념 농구 명예의 전당,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 크리스천 체육홀 명예의 전당 등에 헌정됐습니다. 야우 코치는 암 경각심 고취 운동에서도 많은 일을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2007년에는 ‘암 연구를 위한 V 기금’과 함께 ‘Kay Yow/WBCA 암 기금’을 설립했습니다. V 기금은 야우의 친구인 지미 발바노의 이름을 딴 것이었습니다. 발바노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남자 농구 코치였습니다. 그는 1993년에 암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같은 해 야우는 어머니 리브 야우를 유방암으로 잃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케이 야우는 2009년에 66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망하기 몇 달 전 야우는 더 이상 코치를 맡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었습니다. 체력이 크게 떨어져 그때 예정돼 있던 4차례 큰 경기에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케이 야우는 암과의 싸움을 20년 이상이나 계속했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 캐리 (Cary)에서 열린 그녀의 장례식에는 노스캐롤라이나주 전역의 농구 코치와 선수들, 그리고 다른 곳의 팀 등 수백명이 참석했습니다.

장례식에서 조문객들은 야우가 미리 녹화해 둔 비디오 메시지를 함께 보았습니다. 야우는 참석자들에게 그동안의 지원에 감사를 표하고, 암으로 인한 어려운 시기를 잘 견디게 해준 하느님께도 감사를 나타냈습니다.

야우는 1966년 자신이 쓴 시를 읽었습니다. “스포츠에 대한 나의 생각”이라는 시였습니다. 야우는 이 시에서 스포츠를 통해 인생을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파했습니다. 야우는 스포츠가 자신을 인간 최고의 한계까지 경험하도록 했으며, 때로는 포기를 생각하기도 했다고 썼습니다. 야우는 경기에서의 승리는 전광판에 나타난 점수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케이 야우는 많은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야우는 뛰어난 코치이자 선생님이며 친구였습니다. 야우는 낯선 사람들에게도 사랑과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그녀가 타계하자 여러 대학 남녀 스포츠팀들은 그녀에게 지극한 존경을 표했습니다.

여자농구 코치 협회는 유방암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 애썼던 야우의 공로를 되새기기 위해 선수들에게 핑크 색 유니폼을 입도록 허용했습니다. 핑크색은 암 예방과 치료를 위한 후원금 지원을 상징했습니다.

사람들은 장례식에서 생전의 케이 야우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신앙에서 오는 그녀의 강인함과 따뜻함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녀가 극도의 고통을 용감하면서도 우아하게 참고 견딘 이야기도 했습니다. 듀크 대학교의 마이크 크리즌젠스키 남자 농구 코치는 “하느님, 케이는 끝까지 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복을 내리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베티 제임슨은 또 한 명의 세계 여자 스포츠 분야의 공로자입니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제임슨입니다. 1950년 베티와 12명의 여성들은 여자 프로 골프 협회, LPGA를 창설했습니다. 이들은 골프의 여러 분야에 관련된 여성들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선수도 있었고, 골프 대회를 조직한 여성도 있었습니다. 대회의 규정을 정하고 관리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LPGA는 창설되면서 여러 언론사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언론사들은 제임슨과 그 동료들이 미녀들이라며 큰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사진기자들은 이들을 열심히 찍었고, “글래머 여자들”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제임슨은 1919년 오클라호마주 노만(Norman)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후에는 텍사스주 달라스에서 자랐습니다. 흔히 애칭인 베티로 불리우는 엘리자베스는 아주 어려서부터 골프를 배웠습니다. 어린 베티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여러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32년 베티 제임슨은 불과 13살 때 유명한 텍사스 퍼블링크스 (Publinx) 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2년 후에는 서던 챔피언쉽 (Southern Championship)에서도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39년과 1940년에는 미 전국 아마추어 대회, U.S. Amateur competition에서 연속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2년 후에는 웨스턴 오픈에서 우승했습니다. 이는 세 차례의 초기 메이저 대회 석권 중 첫 번째 우승이었습니다. 베티 제임슨은 14차례에 걸쳐 메이저 대회 우승을 차지한 뒤 아마추어 선수생활을 벗어났습니다.

1945년 베티는 프로 선수로 나섰습니다. 베티 제임슨은 1947년 여자 U.S. 오픈 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비롯해 여러 차례의 프로 타이틀을 차지했습니다. 그녀의 스코어는 총 295를 기록했습니다. 제임슨은 72홀 토너먼트 경기에서 300 이하를 기록한 최초의 여성이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제임슨은 13차례 메이저 대회 우승을 기록하고 난 다음 그때가 자신의 LPGA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의 여자 골프를 비교하면 그 전적이 그리 대단한 것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골프란 주로 남자들의 운동으로 여겨지던 때였습니다. LPGA는 그같은 사고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이 기구는 여자 골프도 진짜 스포츠라는 것을 인식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베티 제임슨은 1951년 여자 골프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습니다. 제임슨은 1967년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과 여자 스포츠 기금 명예의 전당에도 헌정됐습니다.

2000년, LPGA는 창립 50주년을 맞았습니다. 그해 기념식에서 베티 제임슨은 이 기구의 우수 선수와 지도자 50명 중 한명으로 선정됐습니다. 제임슨과 12명의 LPGA 첫 설립자들은 여자 골프의 목표를 더욱 높이 끌어올린 공로로 커미셔너스 상을 받았습니다.

베티 제임슨은 2009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토록 큰 일을 해낸 그녀였지만 말년에는 가난에 찌들었습니다. 베티 제임슨은 그러한 상황이 자신을 깨우치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골프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언제나 우승했을 때보다 졌을 때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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