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경제가 상당히 악화하고 있지만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때처럼 엄청난 위기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전문가들이 진단했습니다. 하지만 핵과 자력갱생을 고수하는 정책이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김영권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미국과 한국의 경제 전문가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여파로 자본주의 국가들마저 경제가 흔들리고 향후 전망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국경을 장기간 봉쇄 중인 북한의 경제 상황을 진단하는 것은 큰 무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최근 일부에서 주장하는, 여러 악재가 동시에 발생해 엄청난 파괴력을 내뿜는 ‘퍼펙트 스톰’ 상황은 아직 아니라고 지적했습니다.
북한의 경제가 매우 빠르게 악화하고 있지만, 옛 소련 붕괴와 중국 쇼크로 전략물자와 식량이 바닥난 상황에서 자연재해까지 겹쳐 대기근을 초래했던 ‘고난의 행군’ 상황과는 차이가 있다는 설명입니다.
한국 서울대학교 김병연 교수는 28일 VOA에, 식량 확보력과 시장 기능, 경제성장률 등에서 북한의 현 상황은 아직 ‘고난의 행군’ 시기의 충격에는 이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김병연 교수] “아직 그런(페펙트 스톰)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난의 행군’ 때는 식량 생산이 350만t 정도 됐지만, 지금은 400만t 중반대에 외부 지원도 있는 것 같고. 둘째는 북한에 시장이 작동하기 때문에 고난의 행군 때는 배급이 끊기면서 식량을 구할 수 있는 채널이 없었지만, 지금은 시장이 작동하면서 식량이 지역 간 배분되는 게 그 때보다 훨씬 원활합니다. 따라서 식량 등 여러 사정을 보면 고난의 행군 때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 같습니다.”
경제성장률 역시 ‘고난의 행군’ 때는 이전에 비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30~40% 급감했지만, 지금은 고강도 대북 제재가 본격화된 2017년부터 현재까지 합해도 15~20% 정도로, 당시 충격의 절반 수준이란 겁니다.
이석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도 앞서 보고서에서 “1994년과 유사한 충격이 동시에 나타난다고 해서 이를 근거로 곧바로 북한 경제가 또 다른 경제 위기에 빠질 것으로 예단하는 것은 현명한 추론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에는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 여파, 당시 공산권 붕괴로 북한을 도와줄 나라가 거의 없었던 반면, 지금은 시장을 통한 주민들의 자생력, 북한의 불안정을 바라지 않는 다양한 주변국가들이 지원 여력과 의지가 있어서 곧바로 “또 다른 경제위기로 빠질 것으로 추론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란 겁니다.
미 조지타운대학의 윌리엄 브라운 교수는 북한 경제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지만 ‘삼중고’로 인한 ‘퍼펙트 스톰’이란 표현에 동의하기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브라운 교수] “I wouldn't say triple, but I would say it's one big storm and the one big storm is their inability to trade with China.”
자연재해는 북한이 거의 매년 겪는 만성적 문제로, 근본 원인은 대외적 요소들에 대응하기 힘든 북한 경제의 구조적 문제에 있다는 설명입니다.
아울러,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가뜩이나 나쁜 경제를 더 악화시켰지만 결국 제재 등으로 인해 중국과의 교역이 어려워진 “하나의 큰 폭풍”이 작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연간 20억 달러에 달하는 무역적자를 비공식 채널로 막는 데 한계가 있고, 지난 2년 간 국가재원 부족으로 기존 산업에 투자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시장 물가를 강제로 고정하는 것도 무리이기 때문에 김정은 위원장의 시름이 깊어질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김병연 교수는 김 위원장이 지난해 말 `정면돌파’를 내세우며 짰던 전략이 코로나바이러스 여파로 틀어져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김병연 교수] “김정은에게 더 중요한 충격은 시장 충격이나 산업 충격일 겁니다. 왜냐하면 시장이나 산업 충격은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출은 많이 못하더라도 수입을 계속해서 수입품이 시장에 공급되고 중국에서 원부자재 사 와서 공장을 돌리고, 다시 말해 무역적자를 확대하는 쪽으로. 그럼 외화 수입 충격은 오히려 키울 수 있지만, 정치적으로 더 민감한 시장이나 산업 충격은 더 낮추는 쪽으로 정책을 짰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게 코로나 때문에 다 무너져내린 겁니다.”
브라운 교수는 북한 당국의 재원이 빠듯해지면서 공장 가동과 임금 등 다방면에 충격을 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국가기관 종사자들과 평양시민 등 충성계층에 대한 배급과 지원이 어려워지는 상황이 김 위원장의 최대 고민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경제 논리보다 정치 논리를 앞세우는 북한 수뇌부 입장에서 충성계층의 궤도 이탈은 가장 큰 우려 사안일 수 있다는 겁니다.
브래들리 뱁슨 전 세계은행 고문과 캘리포니아주립 샌디에이고대학의 스태판 해거드 교수는 경제난이 심화하고 있지만, 김정은 위원장이 당장 찾을 수 있는 돌파구가 별로 없어 보인다며 비핵화 협상 등 대외 협력을 통해 근본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뱁슨 전 고문은 특히 인도적 지원단체뿐 아니라 유엔개발계획(UNDP) 등 국제기구들에 문호를 열고 협력해 인간안보 개선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뱁슨 전 고문] “Open up to the NGO community not just for humanitarian aid to allow the UN to play a more expansive role there, and for the member states of the UN to give the UNDP and some of the specialized agencies of the UN more rope to engage,”
뱁슨 전 고문은 이어 자신이 김정은 위원장의 경제고문이라면 국제통화기금(IMF) 전문가들을 최대한 빨리 초청해 금융 등 경제 통계를 공개하고 협력해 투자를 유치하도록 조언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국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임수호 선임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북한이 경제의 중앙집권화를 강화해 자원 배분의 균형화를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장기적 차원의 정면돌파전을 추진할 경우 군수 분야에 대한 ‘속도’ 중심의 노선보다 군수와 민수, 중공업과 경공업 등 경제 전반의 안정을 우선하는 균형 중심의 발전노선을 채택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입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이런 노선이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김규철 부연구위원은 28일 VOA에, 자원의 재분배 등 균형도 필요하겠지만, “근본적으로 제재가 풀리지 않고서 북한 경제가 자립할 수 있다는 것은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농장과 기업소 등에 인센티브를 주겠다는 정책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비료나 트랙터 등 설비를 동시에 지원해야 실적이 가능하기 때문에 제재 해제 없이는 한계가 있다는 설명입니다.
브라운 교수는 북한 정부가 재원이 빠듯해 제대로 투자하기 힘든 만큼 점진적으로 국가경제의 민영화를 시도하는 게 단기적이고도 장기적인 해법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브라운 교수] “I think, more likely solution for them, it's actually a better solution for them is to gradually privatized their economy,"
국가 소유 기업과 건물, 농장을 민간에 점진적으로 판매해 개인의 소유권을 인정하면 다른 사회주의체제 국가들처럼 근본적인 문제를 쉽게 극복할 수 있다는 겁니다.
김병연 교수는 많은 북한 주민들이 ‘고난의 행군’ 때와 달리 정치·경제적 문제의 근본 원인을 알고 있기 때문에 북한 수뇌부도 과거 같은 강압적 방법이 아닌 5개년 계획 예고 등을 통해 다독이는 형국이라고 말했습니다.
김 교수는 북한 당국이 군량미를 주민들에게 조달하고, 권력층과 돈주들이 저축한 돈을 사회에 더 환원하며, 정부 사업보다 돈주들에게 공채-사업권을 판매해 그 돈을 주민들에게 나눠주는 단기적 처방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