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파견 북한 엘리트들의 자녀들은 인터넷 등 자유로운 세상을 경험했기 때문에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을 극히 꺼린다고 전직 북한 간부 자녀가 VOA에 말했습니다. 비단 엘리트 계층뿐 아니라 일반 주민들도 자녀의 미래를 위해 가족이 함께 탈북하거나 자녀만 한국으로 보내는 사례가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김영권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최근 미국 ‘CNN’ 방송과 한국으로의 망명에 대해 인터뷰 한 류현우 전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사대리는 탈북 이유 중 하나로 10대 딸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류 전 대사대리는 특히 딸이 한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인터넷을 마음껏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외교관 등 해외 파견 북한 엘리트들과 이들의 자녀, 유학생들 사이에서 이런 일은 새삼스러운 게 아닙니다.
해외 북한 유학생들, 인터넷 정보에 충격
김일성종합대 출신으로 베이징에서 유학 중 한국으로 망명한 김준혁 씨는 VOA에, 중국 대학 기숙사에서 처음으로 접한 인터넷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녹취: 김준혁 씨] “기숙사에서 연결해 주더라고요. 이게 인터넷 선이라고 하면서. 그래서 어 그런가 보다 하면서 인터넷 모양의 익스플로어를 누르고 들어갔는데, 구글도 있고 검색창이 있길래 그냥 쳐봤는데, 막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와! 신기하다고 생각했고.”
김 씨는 당시 호기심에 지도자 이름도 검색했다가 북한에서 배운 것과 너무 다른 정보에 넋을 잃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김준혁 씨] “그러면 이런 것도 나오나 하고 ‘김정일’을 치니까 위키피디아가 뜨더라고요. 김정일에 대해 모든 것이 나오는데 넋을 잃고 두 시간 동안 그런 것들만 봤던 것 같아요. 김정일, 김일성, 김정은 이런 검색어를 넣고 와! 이랬구나! 저랬구나! 하면서 인터넷에 빠져들게 된 시간이 엄청 빠르고 흡인력이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북한 지도자의 비밀자금을 관리하는 노동당 39호실 해외 파견 간부의 아들로, 부모와 함께 미 동부에 사는 이현승 씨는 4일 VOA에, 류 전 대사대리와 김 씨의 경험에 공감이 간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이현승 씨] “공감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자유롭게 정보가 공유되는 세상이 있다는 것 자체가 저도 놀라웠죠. 특히 어린 사람들은 해외생활에 빨리 적응합니다. 그래서 인터넷도 보고 한국 드라마도 서슴없이 보고.”
어린 자녀들, 평양 복귀에 반발
나이에 상관없이 일단 해외에 나와 1년 정도 지나면 북한에 돌아가기를 대부분 원하지 않으며, 어린 자녀들은 평양 복귀에 대한 반발이 훨씬 더 심하다는 겁니다.
[녹취: 이현승 씨] “너무 어릴 때 나온 사람들은 들어가기를 싫어하죠. 북한에 들어가면 조직생활을 해야 하고 매일 사상학습 하고 하니까 그런 데 익숙하지 않아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때문에 과거 북한 수뇌부가 해외 파견 관리들에게 자녀 1명만 남기고 평양으로 복귀시키라고 지시했을 때 자녀들끼리 서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가정에 불상사가 생긴 사례들도 있었다는 겁니다.
이런 움직임은 이미 오래 전부터 반복됐습니다.
장승길 전 이집트 주재 북한 대사 미국 망명, 아들 영향 커
지난 1997년 장승길 이집트 주재 북한대사 부부가 미국으로 망명할 당시 카이로 주재 대사였던 임성준 전 한국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앞서 VOA에, 장 전 대사의 망명은 아들의 영향이 컸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10대 후반이던 장 전 대사의 아들은 한국대사관에 전화해 서울에 보내 달라고 요청하는 등 현지에서 상당히 자유분방하게 생활했다는 겁니다.
장철민으로 알려진 장 전 대사 아들은 결국 잠적해 캐나다로 망명했고, 장 대사 부부도 이후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녹취: 임성준 전 대사] “(행사에서 장 대사를 만나) 구석으로 가서 얘기 좀 합시다, 했더니 굉장히 당황하면서 일단 따라오더라고요. 그래서 아들 얘기를 해줬죠. 아들에게 (통화하면서) 아버지 속 썩이지 말고 잘 가라고 했다고 했더니 당황하면서도 듣고 제게 고맙다고 말을 했었죠. 그 이후 장 대사도 잠적을 했는데…”
태영호 전 공사, 자녀의 노예 사슬 끊어야
한국에서 국회의원으로 활동 중인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도 탈북의 핵심 이유 중 하나가 “두 아들을 노예의 사슬에서 풀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태영호 전 공사] “북한 외교관 여러분, 부모와 자식 간 숭고한 사랑마저 악용해 자식을 잡아 놓은 김정은을 순한 양처럼만 따르지 말고 다 같이 일어납시다. 그 길만이 훗날 자식들에게 내가 부모로서 너희들의 노예의 사슬을 끊어 주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길입니다.”
태 의원은 두 아들이 북한에서 배운 것과 다른 바깥세상을 경험하면서 왜 북한에서는 인터넷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지, 재판 없이 공개처형을 왜 하는지 등을 계속 물었다며, 고뇌 끝에 망명을 결심하고 “이제 노예사슬을 끊어주니 자유롭게 살라”고 말했다고 회고했습니다.
평양 복귀 해도 지식과 경험 적용 힘들어
김일성종합대 출신인 주성하 ‘동아일보’ 기자는 앞서 VOA에, 해외에서 유학하거나 공부를 많이 해도 북한에서 활용할 게 거의 없다는 것도 복귀에 대한 좌절감으로 작용한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주성하 기자] “해외에 유학 다녀온 아이들이 들어가면 제대로 쓰냐 하면 제대로 못써요. 배워봤자 필요가 없으니까. 나라가 발전하려면 인사관리 시스템, 물류관리 시스템, 회계관리 시스템 등 국제적 표준에 맞게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죠. 그런데 그런 개념조차 없으니까. 그런 것을 배우고 하면 자본주의로 간다 뭐 이렇게 난리 치니까.”
이런 흐름은 해외 파견 관리나 유학생뿐 아니라 북한 내부에도 확산돼 일부 탈북 이유가 달라졌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자녀의 교육과 미래를 위해 가족이 함께 탈북하거나 자녀만 한국으로 보낸 뒤 학비와 생활비를 보내는 북한 부유층이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 내 탈북민 1호 박사인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지난 2018년 ‘중앙일보’에 “최근 단신 입국하는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이른바 ‘유학형 탈북’이 급격히 늘고 있다”며, “부모가 생활비를 대주기 위해 한국에 역송금하는 현상도 빈번해지는 추세”라고 말했습니다.
이현승 씨는 고립된 북한 주민들은 늘 자유와 정보, 배움에 목마르기 때문에 이런 추세가 증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자녀를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은 북한도 다르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이현승 씨] “부모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자녀들이 좀 더 자유롭게 좋은 세상에서 살길 바라는 것은 전 세계 부모의 공통된 마음이니까. 고위직에 있던 사람들도 이제 북한이란 사회가 잘못된 사회라는 것을 안단 말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그걸 알면서 자기 자녀들은 좀 더 좋은 세상에서 살길 바라는 마음이죠.”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