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경험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또 미-한 동맹은 초기에 성공 가능성이 낮아 보였지만, 부침을 이겨내고 지금까지 견고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평가입니다. 조은정 기자가 미국 역사학자들의 분석을 전해 드립니다.
북한 정권의 핵무기 추구의 뿌리는 한국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제임스 퍼슨 미 존스 홉킨스대학 교수가 주장했습니다.
퍼슨 교수는 24일 한미경제연구소 KEI가 주최한 한국전쟁 관련 토론회에서,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진전을 낸 것은 훨씬 뒤의 일이지만 그 생각은 한국전쟁에서 유래됐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시사했고, 1957년에서 1958년 사이 미국의 전술핵무기가 한국에 배치돼 “북한이 핵의 그늘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퍼슨 교수] “The real turning point was the Cuban Missile Crisis. When the North Koreans really understood that if push came to shove the Soviets were not going to come to their aid.”
퍼슨 교수는 북한이 핵 개발 야욕을 굳힌 것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였다고 말했습니다. 소련의 핵탄도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려는 시도를 둘러싸고 미국과 소련이 대치해 핵전쟁 발발 직전까지 갔던 상황이었습니다.
퍼슨 교수는 당시 김일성 주석이 북한 주재 소련대사를 만나 미국의 공격 가능성에 대비해 지대공 미사일과 미그-21 전투기, 잠수함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한 일이 결정적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소련의 핵우산을 믿을 수 없으며, 소련이 급박한 상황에서 도움을 주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또 한국전쟁 중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이 수세에 몰렸는데도 중국과 달리 소련이 적극 지원하지 않은 점도 김일성의 뇌리에 각인돼 있었다고, 퍼슨 교수는 설명했습니다.
전쟁 후 핵 개발 의지를 키워가던 북한과 달리 한국은 동맹인 미국과의 관계 강화를 택했습니다.
한국전쟁 전문가인 윌리엄 스툭 조지아대 석좌교수는 이날 토론회에서, 정전협정 체결 직후 미-한 상호방위조약이 맺어진 것은 당시 이승만 한국 대통령이 강하게 원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미국은 당시 그럴 마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스툭 교수] “Syngman Rhee threatened to refuse to either sign or abide by the armistice unless the U.S. gave him a National Security Treaty”
이승만 대통령은 상호방위조약을 맺지 않으면 정전협전을 서명하지도 준수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협박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미국은 상호방위조약을 맺으면서 ‘1년 전 파기 통고’ 조항과 ‘적의 공격이 있어도 헌법적 절차를 통해서만 공통의 위험에 대응한다’는 조항을 넣어 한반도에서 추가 확전에 개입하지 않으려 했다고 스툭 교수는 설명했습니다.
이처럼 상호방위조약의 내용을 보면 미-한 동맹의 장기적인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견고히 이어지고 있다는 평가입니다.
[스툭 교수] “By late 1965, very concrete signs had emerged that the ROK could become less of a strategic liability to the United States, and perhaps even a strategic asset.”
또 미국이 한국을 ‘짐’이 아닌 ‘자산’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1965년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전후 보상을 받고 경제발전을 하기 시작한 것이 기점이라고 스툭 교수는 말했습니다.
이에 더해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 전술핵무기 한국 배치 등도 미국이 한국을 자산으로 여기게 된 배경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한편, 한국전쟁의 연원에 대해 퍼슨 교수는 “미국이나 한국이 아닌 북한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강조했습니다.
[퍼슨 교수] “We know with certainty from the materials released from the Soviet archives that North Korean leader Kim Il Sung sought and received the blessings of the Soviets and the Chinese to start the conflict.”
옛 소련의 기록물들은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의 승인을 받고 전쟁을 일으키려 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툭 교수는 아울러 한국전쟁을 ‘내전’으로만 볼 수 없다며, 국제전의 성격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 국경을 맞대고 신탁통치를 한 지역은 한반도 밖에 없으며,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 벌어진 상황은 그 맥락 안에서 이해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툭 교수는 심지어 북한의 전투 계획도 소련인들이 러시아어로 작성했다고 말했습니다.
VOA 뉴스 조은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