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한국 정부가 북한에 빌려주고 돌려받지 받지 못한 차관 규모가 1조원, 미화로 9억 달러가 넘지만 북한은 한국 측의 거듭된 상환 요청에 일절 응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북한에 대한 보다 분명한 요구가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김환용 기자가 보도합니다.
한국 통일부가 13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조태용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지난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약 1조700억원, 미화로 약 9억3천300만 달러 규모의 차관을 북한에 제공했습니다.
항목별로는 식량차관이 7억2천만 달러로 가장 많았고 철도와 도로 연결 자재 장비 차관이 1억3천290만 달러, 경공업 원자재 차관이 8천만 달러 등입니다.
이 가운데 북한은 경공업 원자재 차관에 대해 2007년과 2008년 등 두 차례에 걸쳐 240만 달러 규모의 아연괴로 일부 현물 상환했을 뿐입니다.
아직 상환기한이 도래하지 않은 자재 장비 차관을 제외해도 북한이 당장 한국 측에 갚아야 할 상환액은 원금만 약 7억9천800만 달러에 이릅니다.
한국 정부는 그동안 남북협력기금 수탁기관인 수출입은행을 통해 경공업 원자재 차관에 대해 27건, 식량차관에 대해 35건 등 총 62차례 차관 상환을 촉구하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가장 최근 이뤄진 공문 발송은 지난달 28일이었습니다.
수출입은행 중국 베이징사무소가 평양 조선무역은행 총재 앞으로 팩스와 우편을 발송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지금까지 이런 한국 측 공문들에 대해 한번도 회신하지 않았습니다.
조 의원은 13일 ‘VOA’와의 전화통화에서 북한이 기존 채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가운데 문재인 정부가 남북간 철도 도로 연결 사업에 합의하고 2018년 말 착공식까지 연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조 의원은 북한의 경제난을 감안하더라도 수출입은행 차원이 아닌 통일부 차원에서 이에 대한 문제 제기를 꾸준히 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녹취: 조태용 의원] “이건 다 정확히 계약서를 쓰고 한 차관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계약서가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아야 북한도 시장경제의 교육을 받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남북간이지만. 북한이 답을 안하고 있잖아요. 존재 자체를 인정 안하는 건데 그건 안됩니다. 그건 받아들일 수 없고 부채 존재를 인정하고 두 번째는 당장 갚을 수 없다면 재조정을 해서라도 갚는 계획을 만들어 조금씩이라도 받아야 합니다. 그걸 하면서 새로운 북한과의 사업을 해야 된다는 게 제 주장입니다.”
통일부는 조 의원에게 보낸 서면자료에서 “현재 연체된 대북 차관 원리금에 대해 수출입은행이 재판상 청구와 집행, 보전 등 채권자의 권리를 행사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통일부는 그러나 “통상적 채권처럼 소멸시효를 적용하기는 어렵다”고 밝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상환을 촉구하겠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김형석 전 통일부 차관은 과거 한국 정부가 식량을 차관 형식으로 북한에 보낸 것은 사실상 인도적 지원의 성격이 강했지만 그런 명목으로 하기에 규모가 커 이에 대한 국내 비판여론을 의식한 때문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사회주의권에서 차관은 대부분 사실상의 경제원조였기 때문에 북한이 한국으로부터 제공받은 차관도 비슷한 성격으로 간주하고 한국 측의 상환 요구를 무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김 전 차관은 북한을 강제할 수 있는 법적 수단이 없는 상황이지만 향후 남북관계의 진전 가능성을 감안해 북한에 대한 상환 요구는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녹취: 김형석 전 차관] “앞으로 남북관계가 변화할거 아니에요? 그러면 그 때 예를 들어서 북한에 대해서 채권을 주장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상환을 받거나 다른 대가를 받을 수 있죠. 그러니까 우리 스스로 이걸 안 받는 걸로 하겠다, 소멸된 걸로 하겠다고 할 필요가 없는 거죠.”
한국 정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 조한범 박사는 북한이 한국에 진 빚에 대해 책임있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한국 내 여론에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북한이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을 통해 공개한 신형 무기들을 보는 한국 국민들로선 모순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녹취: 조한범 박사] “이번 열병식을 보면 전략무기인 신형 ICBM, SLBM 뿐만 아니라 탱크, 자주포, 장갑차, 방사포, 개인 장구류까지 상당히 많은 돈을 북한군 현대화에 썼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 정부의 차관에 대해서 응답하지 않는 것도 모순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죠.”
민간 연구기관인 아산정책연구원 고명현 박사는 남북관계 특수성을 감안할 때 한국 정부가 북한을 단순히 경제적 관계로만 볼 수 없는 게 사실이지만 향후 남북경협 분위기가 만들어지더라도 악성 채무자한테 또 돈을 빌려주는 게 말이 되느냐는 비판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서울에서 VOA 뉴스 김환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