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위로 떠오른 북한 '핵 동결 협상론'…미국 선택 주목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가운데)이 지난 9월 뉴욕에서 열린 미·한·일 3국 외교장관 회담에서 발언하고 있다. 대니얼 러셀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왼쪽)와 사만다 파워 유엔 주재 미국대사가 배석했다.

미국 고위 당국자들이 북한 비핵화에 회의적 시각을 공개리에 내비치면서 “동결”을 협상 재개 조건으로 거론하고 있어 주목됩니다. 미국이 현실적 위협으로 성장한 북 핵 역량을 우선 제한하는데 초점을 맞춰 모종의 타협점을 찾고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는데요. 북한의 5차 핵실험 이후 부각된 “핵 동결 협상론”과 이행 가능성을 백성원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북한에 대한 일종의 유화 신호로 들릴 수 있는 “동결”과 “평화” 표현은 모두 미 최고위 외교 당국자인 존 케리 국무장관에게서 나왔습니다.

[녹취: 존 케리 국무장관] "The immediate need is for them to freeze where they are, to agree to freeze and not to engage in any more provocative actions…”

지난 9월 18일 북한이 즉각 취해야 할 조치로 핵 “동결”을 언급한 데 이어 지난달 19일엔 북한에 “새 평화 방안과 외교 정상화”라는 당근을 제시한 겁니다.

모두 동맹국들과의 단호한 대북 공조를 다짐하는 자리에서 나온 발언이어서 미국의 적극적 대북 협상 의지를 반영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당국자의 한 두 마디 말로 대북 기조를 판가름해선 안 된다는 미 조야의 진단이 뒤따랐지만 이번엔 정보당국 고위 관리가 북한 비핵화를 아예 가망 없는목표로 단언해 큰 파장이 일었습니다.

[녹취: 제임스 클래퍼 국장] “I think the notion of getting the North Korean denuclearize is probably the lost cause. They are not going to do that. That is their ticket to survival.”

북한은 핵무기를 “생존을 위한 티켓”으로 여긴다는 제임스 클래퍼 국가정보국장, 그나마 바랄 수 있는 최대치는 북 핵 능력의 제한일 것이라고 말해 어디까지 미국의 의중을 담은 것인지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제임스 클래퍼 미 국가정보국장이 지난달 뉴욕에서 열린 미국외교협회(CFR) 주최 세미나에서 발언하고 있다.

미 고위 당국자들에 의해 대북 협상 재개 조건으로 언급된 “동결”이 기존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에서 한 발 물러난 차선책 아니냐는 의구심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제기됐습니다.

앞서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의 “북 핵 능력 제한(cap)” 발언이 공교롭게도 최근 말레이시아에서 북한 외교 당국자들을 만나고 전날 돌아온 리언 시걸 미국사회과학원(SSRC) 동북아안보협력 프로젝트 국장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는 점도 눈에 띠는 대목입니다.

말레이시아 회동을 기획하는데 깊이 관여한 미국의 한 소식통은 ‘VOA’에 비핵화는 결국 “절차(process)”에 관한 것이라며, 이번 회동에서 동결 등 단계적비핵화 과정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음을 시사했습니다.

또 회동에 참석한 조셉 디트라니 전 6자회담 차석대표는 9.19 공동성명을 “정상적 관계 수립 절차를 담은 포괄적 합의”로 평가해, 북한 관리들에게 일종의 “외교 정상화” 방안을 반대급부로 제시했을 것이란 추정도 나왔습니다.

[녹취: 조셉 디트라니 전 차석대표] “The joint statement really, really was very comprehensive……”

게다가 미국 측 참석자들은 이번 접촉 결과를 내년 1월 출범하는 미국 새 행정부에 전달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해 핵 동결을 위한 협상이 차기 정부의 대북정책 옵션으로 부각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지난달 미국과 북한의 비공개 접촉이 진행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한 호텔에서 조지프 디트라니 전 미국 6자회담 차석대표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미국과 북한이 “동결”을 각자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로버트 아인혼 전 국무부 비확산.군축 담당 특보는 미 고위 당국자의 “동결” 발언을 정책 변화로 해석해선 안 된다며, 미국은 늘 북한의 비핵화를 단계적과정으로 보고 동결을 그 중간 과정으로 인식해왔다고 설명했습니다.

[녹취: 로버트 아인혼 전 특보] “It would be an interim measure on the path to a nuclear weapons free Korean peninsula…”

“동결”을 장기 목표인 비핵화로 가기 위한 과도기적 절차로 내세우려는 미국의 협상 전략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겁니다.

반면 이 같은 ‘핵 동결 협상론’이 핵 보유국으로 인정받겠다는 북한의 야심과 맞물려 자칫 일종의 군축 수단으로 활용될 위험성을 지적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녹취: 데이비스 스트로브 전 과장] “I believe the freeze is a mirage…”

데이비드 스트로브 전 국무부 한국과장은 북 핵 동결 개념을 “신기루”에 비유하며, 북한이 그런 협상에 관심을 보인다 해도 이는 북 핵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피로감을 누적시켜 결국 비핵화 목표를 포기하도록 만들려는 전술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게다가 북한이 요구할 막대한 동결 대가에 대한 정치적 뒷받침 역시 얻지 못한 채,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에 미국이 언젠가는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만 안겨주는 부작용을 낳을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특히 핵 과학 전문가들은 동결 여부를 검증할 기술적 수단이 없다는 한계를 중대한 결함으로 꼽습니다. 데이비드 올브라이트 과학국제안보연구소 소장입니다.

[녹취: 데이비드 올브라이트 소장] “We have to be careful what a freeze is; the freeze is no longer stopping activities at Yongbyon…”

북한이 이미 제2의 원심분리기 시설을 가동 중인 것으로 보여 이제는 단순히 영변 핵 시설 중단을 동결로 간주할 수 없다는 지적입니다.

랠프 코사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태평양포럼 소장은 이런 이유 때문에 “동결”이 북한의 핵 물질 농축 프로그램 중단 대신 (핵. 미사일) 실험 유예만을 의미하게 됐다며,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내다봤습니다.

[녹취: 랠프 코사 소장] “So I think the best that we can hope for from, I mean freeze, would be to stop the tests…”

하지만 이런 우려는 어디까지나 두 나라가 동결 협상 쪽으로 의견을 좁히는 상황을 상정한 것으로, 북한은 핵 역량 제한과 관련한 어떤 협상에도 응할 의사가 없음을 누누이 밝혀왔습니다.

앞서 북한의 한 고위 외교 당국자는 지난 4월 ‘VOA’에 핵 개발은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여부와 관계 없다고 밝혀, 기존의 ‘선평화협정 후비핵화’ 조건 마저 폐기한 게 아니냐는 의문을 낳았습니다.

[녹취: 북한 외교 당국자] “우리 병진노선은 세계 비핵화 될 때까지 하루도 멈춤 없이 계속 전진한다 이겁니다.”

중국이 제안했던 비핵화와 평화협정 병행 추진 방안도 북한 당국의 입장과 다르며, 전세계 비핵화가 실현될 때까지 북한의 비핵화를 기대하지 말라는 주장입니다.

북한은 그 동안 비핵화보다 평화협정 체결이 우선시돼야 하며 비핵화는 북한에 가해지는 위협이 사라진 뒤 평양의 결심에 달린 문제라는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이 관리는 또 9.19 공동성명 역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게 북한 당국의 입장이라며, 비핵화 목표를 담은 9.19 공동성명은 이미 “지나간 합의”라고 일축했습니다.

핵 동결과 지원을 맞교환 했던 2.29 합의의 실패를 겪은 지 채 5년도 안 되는 시점에서 미국 정부가 또다시 “동결” 카드에 손을 뻗을지, 이제 그 고민도 차기 행정부의 몫으로 넘어가게 됐습니다.

VOA 뉴스 백성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