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정보를 통해 세상을 알고 탈북해 한국에서 성공 일지를 써가는 탈북 가장이 있습니다. 강원도 고성에서 잠수부인 머구리와 식당을 운영하며 지역 유명 인사가 된 박명호 씨가 주인공인데요. 한반도의 설 명절을 맞아 박명호 씨의 억척 성공 분투기를 오늘부터 두 차례에 걸쳐 보내드립니다. 서울에서 김영권 특파원이 보도합니다.
[녹취: 한국 방송 보도] “국토교통부는 이번 연휴 기간 모두 4천 895만 명의 민족 대이동이 있을 걸로 내다봤습니다. 이 가운데 86%가 승용차를 이용할 것으로 보입니다.”
설 연휴 기간에 수많은 한국인이 이동하고 해외로 여행을 떠난다는 뉴스를 보는 박명호 씨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집니다.
이동의 자유가 거의 없는 북한 주민들과 어디든 자유롭게 이동하는 한국인들의 현실이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녹취: 박명호 씨] “내가 우리가 식물인가? 식물은 씨앗이 떨어지고 누가 옮겨줘야 살지 우리는 동물이다. 마땅하지 않으면 옮기는 건 동물의 본능이다. 그걸 못 움직이게 하면 되는가 그거요.”
박 씨는 북한과 마주하는 강원도 고성군 대진항 인근에서 머구리(잠수부) 활동을 하며 횟집을 운영하는 어엿한 사장입니다.
[녹취: 박명호 씨] “이건 개멍게, 참멍게, 해삼. (이걸 다 손으로 직접 잡으셨나요?) 그렇죠. 매일 이런 거 잡죠. 저쪽으로 소라, 문어….”
동해 수심 30m에 들어가 박 씨가 직접 잡은 큼지막한 자연산 해산물이 수조 안에 가득합니다.
박 씨는 부인, 큰 아들 부부와 함께 운영하는 ‘청진호 횟집’, 가족이 함께 사는 양옥집, 자가용 두 대, 2t 무게의 어선까지 보유한 나름 성공적으로 정착한 탈북민입니다.
[녹취: 박명호 씨] “2년을 남의 배를 타면서 하나하나 모았죠. 모아서 그 다음에 2년 만에 샀죠.”
과거 북한 공군 중대장 시절 식량난을 해소하기 위해 머구리 활동을 하며 이용했던 낡은 목선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녹취: 박명호 씨] “(제 배의) 마력수가 200마력이 되는데요. 북한에 200마력이라면, 3급 기업소가 되는 수산사업소가 200마력 되는 배가 한 척 겨우 있을까 말까 하다고요. 내 배가 200마력인데. 2급 기업소 3급 기업소 제대로 된 차 한 대도 없는 기업소도 많은데 내 집에 차가 두 대인데.”
최근 북한이 동해에서 무리하게 조업하다 유령선이 된 수많은 목선을 보면 자신이 있을 때와 상황이 바뀌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합니다.
[녹취: 박명호 씨] “변한 거 없어요. 하나도 변한 게 없어요. 그 때보다 더 열악해진 것 같더라고. 배는 오히려 잘 만들지 못하더라고. 탄탄하지 못하게. 북한도 나무가 없어요. 더 안 좋은 나무로 배를 만들 수밖에 없단 말이에요.”
지난 2006년 이런 불안한 목선에 아내와 두 아들을 태우고 한국에 온 박명호 씨가 오늘의 성공을 누리기까지는 남다른 의지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녹취: 박명호 씨] “보통 여기 잠수부들은 날이 조금 안 좋고 그러면 (바다에) 안 나가요. 또 술 마셨다고 안 나가고, 그런데 나는 북한에 있을 때 배고픔. 이걸 남한 사람들은 기억을 못 하잖아요. 모르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배고픔이란 기억을 몸이 기억하기 때문에 잊어먹지 않아요. 내 좌우명은 여기 와서 그거에요. 내가 오늘 배 안 나가면 내일 아침에 우리 집 가마솥에 넣을 쌀이 없다. 지금도 그 게 내 좌우명이예요. 난 무조건 나가는 거예요 (웃음)”
이렇게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남의 배에 2년 동안 일할 때는 한 달에 500만원 안팎, 미화로 4천 500여 달러를 벌었습니다. 또 선주가 된 지금은 한 번 출항할 때마다 150만 원에서 300만원, 미화 1천 300 달러에서 2천 600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요즘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서민 갑부’가 됐습니다.
게다가 가족이 운영하는 ‘청진호’ 횟집은 박 씨가 주인공을 맡아 2017년에 개봉한 다큐 영화 ‘올드 마린보이’와 여러 TV 프로그램 출연 이후 고성에서 가장 인기 있는 횟집이 됐습니다.
[녹취: 올드 마린보이 트레일러] “사실 잠수 일은 지금도 두렵거든요. 근데 어쩌겠어요? 내가 아버지고 내가 남편인데….”
박명호 씨는 북한에서 공군 장교로 복무했고 제대 후 황해도 공군 수산기지에서 군무원으로 일했기 때문에 배고파서 북한을 탈출하지는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박명호 씨] “갑작스런 충동이나 그런 이유로 탈북한 게 아니고요.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사는 세상이 우리가 교육받은 대로 정말 세상에 부러움이 없는 삶인가 하는 의문을 계속 가지고 살아왔었습니다.”
군 복무 시절 동료 장교들과 고려연방제 통일 등에 관해 사상 토론을 하면서 늘 풀리지 않는 의구심이 많았다는 겁니다.
[녹취: 박명호 씨] “고려민주연방제! 누가 누구에게 먹히지도 않으며 누가 누구를 먹지도 않으며! 서로 상대방을 존중하고 서로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한국에) 국가보안법을 해체하라! 장벽을 허물어라 미군을 내보내라. 그렇다면 고려연방제 방식하고 그 요구가 부합되는가 이런 논쟁을 했어요. 그건 부합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결국 이런 의문을 풀어준 열쇠는 외부 정보였습니다
[녹취: 박명호 씨] “이런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남쪽에도 한 번 가고픈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라디오를 구했어요. 라디오를! 라디오를 들으면서 계속 아내를 설득하기 시작했죠.”
‘VOA’ 한국어 방송과 ‘KBS’ 등 외부 라디오 방송을 모두 청취하며 “적어도 한국 정부는 김 씨 정권처럼 가식적이지 않고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했으며 새롭게 도전할만한 사회로 생각하게 됐다”는 겁니다.
[녹취: 박명호 씨] “우리는 밤 2시 3시까지 들었죠. 계속 고저. 그런데 1시 2시 때쯤 짤막하게 시사 프로그램이 나오거든요. 앵커 브리핑 같은 그런…”
박 씨는 방송을 통해 북한 내 교육에 대해 가졌던 의문이 풀렸고, 자유롭게 의사를 표시하고 이동하며 도전하는 한국사회에 대한 동경을 갖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게다가 40년을 산 자신과 아내는 몰라도 어린 두 아들에게는 참다운 인생을 살 기회를 아버지로서 제공하고 싶었다는 겁니다.
2006년 5월 24일. 박 씨는 마침내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이불과 된장 등 살림살이까지 목선에 싣고 황해남도 옹진군의 한 부두를 떠나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한국의 설 명절을 맞아 보내드리는 마린보이 탈북민 박명호 씨의 억척 성공 분투기! 내일 2편을 보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