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종전선언에 대한 북한 최고지도자의 관심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가운데 대북적대시 정책 철회 등을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던 북한은 이번엔 유엔군 사령부 해체를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한국과 북한 사이에 종전선언을 바라보는 입장 차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서울에서 김환용 기자가 보도합니다.
문재인 한국 대통령의 유럽 순방을 수행 중인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3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기자들을 만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최근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 제안에 대해 언급한 데 대해 “의미가 작지 않다”고 평가했습니다.
이 관계자는 프란치스코 교황 방북이나 남북 산림협력 문제와 관련해 북한과 별도 논의가 진행 중이냐는 질문에 “김 위원장이 대외적으로 종전선언을 언급한 게 처음”이라며 이같이 답했습니다.
이 관계자가 말한 김 위원장의 종전선언 관련 언급은 지난 9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행한 발언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김 위원장은 당시 “불신과 대결의 불씨로 되는 요인들을 그대로 두고서는 종전을 선언한다 해도 적대적 행위들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에 대한 존중이 보장되고 타방에 대한 편견적인 시각과 불공정한 이중적인 태도, 적대시 관점과 정책들부터 먼저 철회돼야 한다”고 전제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이에 대해 “북한의 리더십 차원에서 종전선언에 대한 관심을 대외적으로 표명한 것은 의미가 작지 않다”며 “종전선언에 관한 미-한 간 협의를 기초로 북한과 협상할 여지를 찾아봐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북한의 대화 의지와 협상 가능성에 방점을 찍은 발언이지만 북한은 한국 정부의 이같은 평가와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3일 유엔 홈페이지에 공개된 영상에 따르면 김성 유엔 주재 북한대사는 지난달 27일 제76차 유엔총회 4위원회에서 유엔군 사령부의 즉각 해체를 촉구했습니다.
김 대사는 미국이 유엔사를 불법으로 설립했다고 주장하며 “유엔사를 유지해야 한다는 미국의 고집은 한국에 대한 점령을 정당화·영구화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정치·군사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북한이 종전선언을 명분 삼아 주한미군 철수와 유엔사 해체를 요구할 수 있다는 우려가 일각에서 제기되는 상황에서 김성 대사의 발언은 북한이 여전히 유엔사 해체를 바라고 있음을 보여준 겁니다.
민간연구기관인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문성묵 통일전략센터장은 정치적 선언으로 추진하고 있는 한국의 종전선언 구상이 북한의 의도와는 다르다는 게 재차 확인된 셈이라고 말했습니다.
문 센터장은 북한이 종전선언을 악용할 수 있다는 미국의 우려에 힘이 실리는 발언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녹취: 문성묵 센터장] “결국 종전선언이 미칠 위험, 다시 말해 한미동맹에 미칠 부정적 영향 특히 주한미군, 한미연합연습, 유엔사를 포함해서 그동안 북한의 주장을 생각했을 때 이런 부정적 영향들을 우려하는 것은 분명해요.”
한국 정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 조한범 박사는 미국은 유엔군사령부를 아시아에서의 확장 억지력을 유지하기 위한 다자군사협력체에서의 주요 기능을 염두에 두고 강화하고 있다며 종전선언이 기존 체제를 흔들어선 안 된다는 입장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조 박사는 김 성 대사의 발언은 이중기준과 대북적대시 정책 철회를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던 김정은 위원장의 시정연설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조한범 박사] “북한은 종전선언이 자신들의 안전 첫번째 그 다음에 두번째는 북미관계 개선, 대북제재 해제 이런 것과 연관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지 단순히 선언 자체로 국한된다면 의미가 없다는 입장이거든요. 그러니까 종잇장에 불과하다는 얘기를 계속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자신들이 원하는 내용의 방향성이 들어가야 되고 특히 미국이 여러가지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 대한 확약을 종전선언에 넣어주기를 바라는 거거든요.”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한국 정부는 종전선언을 남북대화와 비핵화 협상 재개의 마중물로 삼겠다는 입장으로, 종전선언 자체가 미국이 북한을 적대시 하지 않는다는 신뢰의 표시로 북한이 이해하길 바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박 교수는 하지만 북한은 종전선언으로 가는 과정에서 제재 해제를 유도하고, 종전선언이 이뤄지면 주한미군 철수와 유엔사 해체, 미-한 동맹 흔들기에 동력으로 활용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김정은 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행한 종전선언 관련 언급은 미국이나 한국이 수용하기 어려운 전제조건에 방점이 찍혀있다고 봐야 한다며 한국 정부가 지나치게 희망 섞인 해석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녹취: 박원곤 교수] “특히 김정은이 이야기한 것은 마지막에 시정연설을 통해서 얘기를 했고 그건 북한 주민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고 그렇다면 어떤 형태로든지 김정은이 이야기 한 것에 대한 최소한의 명분이 있어야 종전선언에 임할 수 있다, 그것은 현재 상황에선 어려운 명분들이죠, 적대시 정책 철회라는 게. 연합훈련 중단이나 제재 선 해제를 얘기하니까.”
통일연구원 홍민 박사는 2018년 미-북 첫 정상회담이 이뤄지면서도 종전선언 문제가 제기됐지만 북한이 종전선언을 바라보는 현재의 전략적 입장이 당시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홍 박사는 2018년 당시엔 하나의 트랙에서 북한 비핵화와 미국의 상응조치를 포괄적으로 논의하는 가운데 종전선언이 포함돼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략·전술 핵무기 개발을 주권국가의 정당한 자위권 행사로, 협상 대상에서 배제하고, 종전선언은 북한 비핵화와는 무관한 별개의 협상 트랙으로 진행시키려는 게 북한의 입장이라는 겁니다.
[녹취: 홍민 박사] “종전선언 위상이 2018년엔 소위 한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것들 것 촉진하는 데 밑바탕을 깔아주는 아주 중요한 초석이 되는 역할이 있었어요. 그래서 북한도 그것을 활용해서 미국의 진정성을 확인하고 적대관계 종식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싶은 그런 목적이 딱 있었어요. 지금은 종전선언을 협상테이블에 올려놓고 하더라도 비핵화 트랙과는 분리됐거든요 지금. 그러니까 종전선언을 하는 게 자위권 차원에서의 전략무기 개발을 중단할 용도가 아니에요.”
홍 박사는 북한의 입장이 이처럼 달라졌는데도 종전선언을 비핵화 협상 재개의 입구로 보는 문재인 정부의 시각은 2018년 당시의 관점에 머물러 있다고 말했습니다.
서울에서 VOA뉴스 김환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