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 무력 과시 열병식 개최...김정은 "국가 근본 이익 침탈시 핵 사용"

25일 북한 평양 시내에서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주년 기념 열병식이 진행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이 다음날(26일) 공개한 사진.

북한이 25일 저녁 김일성 주석의 항일유격대인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주년을 맞아 각종 핵 투발 수단을 총동원한 열병식을 열었습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핵무기를 전쟁방지용에만 머물지 않고 국가 근본 이익을 침탈하려는 시도에도 사용하겠다며 미국과 한국을 향한 핵 위협을 노골화했습니다. 서울에서 김환용 기자가 보도합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5일 밤 9시쯤 열린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주년 기념 열병식 연설에서 “핵 무력의 기본사명은 전쟁을 억제함에 있지만 전쟁 방지라는 하나의 사명에만 속박돼 있을 수는 없다”며 “어떤 세력이든 국가의 근본 이익을 침탈하려 든다면 우리 핵 무력은 의외의 둘째가는 사명을 결행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북한 대외관영 ‘조선중앙통신’과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26일 보도했습니다.

김정은(가운데) 북한 국무위원장이 25일 평양 시내에서 열린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이 다음날(26일) 공개한 사진.

김 위원장은 그러면서 “공화국의 핵 무력은 언제든지 자기의 책임적인 사명과 특유의 억제력을 가동할 수 있게 철저히 준비돼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또 “지금 조성된 정세는 공화국 무력의 현대성과 군사기술적 강세를 담보하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조치들을 강구할 것을 재촉한다”며 “보유한 핵 무력을 최대의 급속한 속도로 더욱 강화 발전시키기 위한 조치들을 계속 취해나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핵 무력을 질량적으로 강화해 임의의 전쟁 상황에서 전투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북한 매체들에 따르면 이번 열병식에는 한국을 겨냥해 만든 전술유도미사일부터 미국 본토 타격용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까지 종류별 핵 투발 수단이 모두 동원됐습니다.

북한이 지난달 24일 시험발사에 성공했다고 주장한 신형 ICBM ‘화성-17형’을 비롯해 극초음속 미사일 ‘화성-8형’, 지난 16일 발사한 신형 전술유도무기의 발사 차량 대열이 등장했습니다.

25일 북한 평양 시내에서 열린 열병식에서 '화성-17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행렬이 이동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이 다음날(26일) 공개한 사진.

특히 지난해 1월 당 대회 열병식 당시 처음 선보인 신형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SLBM) 보다 탄두부가 커지고 길이가 1m가량 늘어난 신형 SLBM이 첫 선을 보였고 지난해 10월 북한이 잠수함에서 수중발사에 성공했다고 주장한 ‘미니 SLBM’도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측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26일 입장문을 내고 “북한이 열병식을 통해 지난 5년간 겉으로는 평화와 대화를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와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수단들을 개발하는데 몰두해왔다는 것을 입증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인수위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은 엄중하고 현실적인 위협이 됐으므로 이를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게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라며 “새로 출범하는 윤석열 정부는 미-한 동맹을 강화하고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에 대응할 한국형 3축 체계 능력을 조속히 완성해 나갈 것이며 군사적 초격차 기술과 무기체계 개발을 병행할 계획”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김 위원장이 열병식 연설에서 핵 무력 사용 조건에 ‘국가의 근본 이익 침탈’ 을 포함시킨다는 발언은 북한에 대한 군사적 공격 행위 이외의 비군사적 위기 상황에서도 핵 선제공격이 가능하다는 점을 천명한 것이어서 미국과 한국에 대한 핵 위협을 노골화했다는 분석입니다.

한국 정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이 통일연구원 조한범 선임연구위원은 김 위원장이 전쟁억지력 차원에서 핵을 사용한다는 북한의 기존 핵 운용 교리의 변화를 시사했다며, 국제사회 핵 질서의 기초를 흔드는 발언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녹취: 조한범 선임연구위원] “근본 이익 침탈은 결국은 체제안보 정권안보 체제 위기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거거든요. 좀 더 넓혀서 해석하면 대북 제재 심화로 인한 내부 체제 위기까지 포함될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북한이 그냥 버티기 전략이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버티기에 한계가 올 경우엔 자기들이 선제적으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 핵카드를 쓸 수 있다는 얘기로까지 확대해석이 가능하거든요.”

김 위원장의 이번 발언은 앞서 지난 4일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핵 선제공격 가능성을 언급했던 대남 비난 담화보다 한층 더 위협의 강도가 세진 겁니다.

김 부부장은 군사적 충돌 상황을 전제로 선제 핵공격 가능성을 언급한 때문입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최고 지도자가 직접 한 발언인만큼 북한의 핵 운용 교리의 수정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습니다.

박 교수는 또 김 위원장이 핵 무력 강화 발전을 거듭 강조한 것은 대형 도발을 예고한 발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녹취: 박원곤 교수] “계속해서 자신들이 해 온 계획에 따라, 국방발전 5개년이라고 늘 얘기하는 그 계획에 따라 앞으로도 계획된 미사일 발사 시험 도발을, 핵실험을 포함해서 계속 하겠다는 얘기죠.”

통일연구원 홍민 북한연구실장은 김 위원장의 발언이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지난달 공개한 ‘2022년 핵태세 검토’ 보고서, NPR의 내용에 자극을 받은 측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미 행정부는 NPR 요약본에서 상대의 핵 위협 또는 핵 공격이 없더라도 ‘극단적 환경’(extreme circumstances)에선 핵무기 사용을 고려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과거 후보시절 공약했던 핵무기의 ‘단일 목적 사용’(sole purpose), 즉 ‘핵 공격을 받았을 때만 핵무기로 보복한다’는 원칙이 새 NPR엔 반영되지 않은 겁니다.

홍 실장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와 미국의 갈등, 미-중 경쟁 격화 등 유동적인 국제정세와 미-한 동맹 강화 움직임 등이 겹치면서 북한이 바이든 행정부의 NPR에 맞대응 차원에서 핵 사용 조건을 모호하게 확장시켜놓은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녹취: 홍민 실장] “NPR에 대응하는 부분, 그 다음에 한-미의 북 핵 공조나 확장억제력 강화 움직임, 선제타격론 나오는 얘기들 여기에 대해서 자신도 대응 교리로 의도적으로 지도자가 언급했다 이렇게 보는 게 맞을 것 같아요.”

한편 김 위원장은 이번 열병식에 부인 리설주와 함께 ‘공화국 원수복’ 차림으로 등장했습니다. 김 위원장이 공개 석상에서 공화국 원수복을 착용한 것은 처음입니다.

이와 함께 이번 열병식을 통해 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당비서에서 해임됐던 리병철이 10개월 만에 복귀한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조선중앙통신’은 열병식 참석자를 소개하면서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이며 당 중앙위원회 비서인 리병철 동지”를 호명했습니다.

북한이 군의 뿌리로 여기고 있는 항일유격대 창건 90주년 행사를 국방력 과시의 주요 계기로 삼고자 핵과 미사일 개발에 기여한 리병철을 복귀시켰다는 관측이 나옵니다.

열병식에는 당 정치국 상무위원이자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당 비서를 겸하고 있는 박정천도 참석했습니다.

한국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김인태 책임연구위원입니다.

[녹취: 김인태 책임연구위원] “정치국 상무위원에 군 출신이 2명 들어갔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으니까요. 일단 핵 무력 완성이니까 그 부분과 연결지어서 군사 군수 부문에 일정 기간 힘을 실어주지 않겠느냐 그렇게도 보입니다.”

리병철은 지난해 7월 당 전원회의에서 비상방역에 대한 당의 중요 결정 집행을 게을리했다는 등의 이유로 문책을 받으며 모든 직위에서 해임된 바 있습니다.

서울에서 VOA 뉴스 김환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