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법원이 스페인 주재 북한대사관 침입사건에 연루된 크리스토퍼 안 씨의 당시 행위가 실제로 미국 법에 저촉되는지 검토할 것을 미국 정부에 명령했습니다. 적대국을 상대로 한 미국인의 행동이 미국법의 처벌 대상인지 제대로 들여다보라는 건데, 상당히 이례적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함지하 기자가 보도합니다.
크리스토퍼 안 씨의 법정공방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중부 연방법원이 미국과 적대관계에 있는 북한 정권을 상대로 한 크리스토퍼 안 씨의 행동을 과연 범죄로 해석할 수 있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안 씨의 스페인 신병인도 사건을 심리 중인 페르난도 애닐-로차 판사는 9일 결정문에서 “미북 관계를 둘러싼 지속적인 적대관계와 특수한 상황 속에서 청원인 크리스토퍼 안 씨가 미국법상 범죄로 간주될 만한 행위를 저질렀는지에 대한 상당한 근거를 당사자들이 서면으로 제출할 것을 명령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미 연방법 집행기관이자 이번 심리의 ‘피청원인’인 미국 보안국(US Marshal)이 앞으로 30일 이내에 서면 답변을 제출하고, 청원인인 안 씨 측은 이에 대한 반박문을 30일 이내에 재판부에 내도록 했습니다.
안 씨는 지난 2019년 2월 스페인 주재 북한대사관에 침입해 납치극을 벌인 혐의로 지난 5월 미 캘리포니아 중부 연방법원으로부터 스페인 신병 인도 결정을 받은 바 있습니다.
하지만 안 씨 측 변호인은 미 보안국을 상대로 인신보호, 즉 구금의 적법성을 판단해 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을 제기해 현재 이 심리가 진행 중입니다.
애닐-로차 판사는 “1950년 6월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전쟁 당시 통과된 유엔 안보리 결의에 의거해 미군을 한국에 파병한 이래로 미국은 북한과 군사적으로 충돌했다”며 이후 정전협정에 서명했지만 이는 군대 사이의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한국과 북한 사이 비무장지대(DMZ)를 설정했을 뿐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북한과 미국은 공식적으로 평화를 선언하거나 평화 협정에 돌입한 적이 없고,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도 않다”며 “북한과 한국은 그러는 동안 미사일과 포탄을 계속 주고받았다”고 밝혔습니다.
또 “2017년 11월 20일 미국은 북한 정권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했다”면서 “(미국) 의회는 2004년 북한인권법을 통해 미국 정부가 탈북자와 난민에 대한 지원 제공을 승인하고, 탈북자 지원을 위한 조치를 취할 것도 촉구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지난 5월 재판부가 안 씨의 범죄 혐의를 인정했지만 “당사자들은 미국과 북한 사이에 남아있는 지속적인 적대감과 평화 조약 부재, 그리고 북한의 테러 지원과 같은 요소 속에서도 청원인의 행위가 미국에서도 범죄로 인식되는지를 다루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따라서 애닐-로차 판사는 “안 씨가 자신의 주장대로 탈북자를 돕기 위한 시도를 한 것인지, 혹은 미국 정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가 북한 정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정보와 컴퓨터를 훔쳐 연방수사국(FBI)으로 넘긴 것인지와 상관없이 그러한 행위가 미국 법 위반에 해당하는지는 불분명하다”고 말했습니다.
아울러 현재 미북 관계와 북한의 지위 등을 고려할 때 북한 관리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법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도 불분명하다고 덧붙였습니다.
결국 애닐-로차 판사는 안 씨의 잘잘못 여부와 관계없이 당장 미국인이 적대국가에 행한 범법 행위를 미국 법원에서 미국 법으로 판단하는 게 옳은지 검토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입니다.
미국 검사 출신인 정홍균 변호사는 11일 VOA와의 전화통화에서 이번 명령문은 매우 이례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녹취: 정홍균 변호사] “만일 두 국가 간에 특정한 범죄에 대한 공동인식이 결여됐을 경우에는 신병인도 자체에 대한 무리가 따르게 되겠죠. 크리스토퍼 안의 행위가 미국에서도 동일한 형사적 행위로 간주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적법성 여부를 분석함에 있어서 현재 미국과 북한의 국제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주문이 여기에 붙었다는 것이 참 이례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안 씨에 대해 미국 재판부가 다소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의견을 낸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최초 안 씨의 사건을 담당했던 진 로젠블루스 판사는 지난 5월 안 씨의 스페인 신병인도를 승인하면서도 별도의 결정문을 통해 자신의 결정에 사실상 반대한다는 입장을 피력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특히 안 씨가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살해당할 위험이 있다는 일각의 지적을 수용하면서 당시 결정이 법리적 판단에 따라 불가피하게 이뤄졌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로젠블루스 판사는 “과거 판례나 다른 법 조항에 묶여 있는 자신과 같은 연방 치안판사와 달리 상급 법원은 인도적 예외를 적용할 수 있다고 믿는 만큼, 나는 (상급 법원이) 안 씨의 불가피한 신병인도 문제에서 ‘공범(accomplice)’이 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었습니다.
애닐-로차 판사의 이번 명령이 안 씨의 스페인 신병인도 결정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주목됩니다.
특히 미 보안국이 어떤 근거를 들어 북한에 대한 미국인의 범죄 행위가 불법이라는 법리를 펼지 관심이 쏠립니다.
현재로선 미 보안국이 재판부 설득에 실패할 경우 재판부는 안 씨의 인신보호 청원을 승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경우 안 씨의 스페인 신병인도는 취소되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안 씨는 구치소로 옮겨져 신병인도 절차를 밟게 됩니다.
만약 안 씨에 대한 스페인 신병인도 결정이 내려지더라도 미 국무장관에겐 이를 막을 권한이 있습니다.
미국 법은 국무장관이 ‘미국 시민의 안전상의 이유’를 들어 신병 인도를 반대할 경우 미국인을 제 3국으로 보내지 못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안 씨 측 변호인은 안 씨가 김정은의 조카이자 지난 2017년 피살된 김정남의 아들인 김한솔의 탈북을 도운 사실로 인해 북한의 암살 위협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앞서 VOA는 전 국토안보부(DHS) 고위 관리의 서한을 인용해 미국 정부가 크리스토퍼 안 씨의 신병인도 결정을 막기 위해 관련 부처 간 회의를 개최했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 2021년 1월까지 국토안보부에 근무한 이안 브레크 전 법무담당관 대행은 지난해 재판부에 제출한 서한에서 “당시 국토안보부는 다른 정부 부처와 안 씨의 스페인 신병인도를 피할 수 있는 잠재적 방안을 협의 중이었다”며 “북한의 위협으로 인해 안 씨의 안전에 중대한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최근 한국 여당인 국민의힘 소속 국회의원 6명이 크리스토퍼 안 씨의 스페인 신병인도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미국 법원에 제출하면서 “크리스토퍼 안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미국을 떠난다면 북한 김정은 정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에게 위해를 가하려 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VOA 뉴스 함지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