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러시아 등지에서 탈북민 구조활동을 벌여 온 것으로 알려진 한국 선교사가 올해 초 러시아 당국에 간첩 혐의로 체포돼 구금 상태에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러시아와 외교채널을 통해 소통하면서 사건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김환용 기자가 보도합니다.
러시아 ‘타스’ 통신은 한국 국민 1명이 올해 초 극동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간첩 혐의로 러시아 사법 당국에 체포됐다고 11일 보도했습니다.
‘타스’ 통신은 사법 당국자를 인용해 이 한국인의 성씨가 ‘백’씨라며, 백 씨는 국가 기밀정보를 외국 정보기관에 넘긴 혐의를 받고 있고 그와 관련된 형사 사건 자료는 ‘일급기밀’로 분류됐다고 전했습니다.
‘타스’ 통신은 12일엔 러시아 사법기관 소식통을 인용해 “백 씨에 대한 형사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가 자신을 작가라고 소개하면서 메신저로 국가기밀 정보를 받았다는 것이 확인됐다”고 전했습니다.
이 소식통은 “그는 이 정보를 외국 정보기관에 줘야 했다”고 설명했지만 백 씨가 어떤 정보를 받았는지, 어떤 정보기관을 위해 이런 행동을 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타스’ 통신은 백 씨가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으로, 나이는 53살이고 전과가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그가 결혼해 어린 자녀 1명을 두고 있으며 한국에 있는 대학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다고 전했습니다.
러시아연방보안국(FSB)은 한국 측에 백 씨 체포 사실을 알리지 않다가 지난달 문서로 통보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사를 받은 백 씨가 추가 조사를 위해 지난달 말 모스크바로 이송돼 레포르토보 구치소에 구금됐다고 보도했습니다.
모스크바 레포르토보 법원은 비공개 심리에서 백 씨의 구금 기간을 6월 15일까지로 연장했다고 밝혔습니다.
한국인이 러시아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한국 정부는 체포 사실을 인지한 직후부터 필요한 영사 조력을 제공하고 있다며 구체적인 내용은 현재 조사 중인 사안이어서 언급하기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의 12일 브리핑 발언 내용입니다.
[녹취: 임수석 대변인] “우리 정부로서는 우리 국민이 하루빨리 가족들의 품으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기를 기대하고 이를 위해 러시아 측과 필요한 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한국 내 북한 인권 활동가는 ‘VOA’와의 전화통화에서 백 씨가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주로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탈북민 구출과 인도적 지원 활동을 해 온 선교사라고 밝혔습니다.
백 씨는 민간인 신분으로 지난 1월 중국에서 육로로 블라디보스토크로 입국한 뒤 며칠 간 생활하던 중 러시아 연방보안국에 체포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한국의 ‘연합뉴스’에 따르면 백 씨는 지난 10년 가까이 중국이나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하바롭스크 주 등을 오가며 북한 노동자 등을 지원하는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백 씨는 연해주선교사협의회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로 개인적으로 현지 활동을 했고 여행업체에도 관여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타스’ 통신은 백 씨가 2020년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사무실을 둔 여행사 ‘벨르이 카멘’의 이사직을 맡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러시아 국가기밀을 외국 정보기관에 넘긴 혐의를 받는 백 씨의 유죄가 확정될 경우 20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 등 러시아 극동 지역엔 북한이 파견한 노동자들이 적어도 수만명 살고 있고 이들을 돕는 한국인 선교사들도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국 내 북한인권단체인 북한정의연대 정베드로 대표는 한 때 러시아 당국은 한국인 선교사들의 북한 노동자 지원활동에 협조적이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한러 관계가 불편해지고 북러 관계가 강화되면서 태도가 바뀌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정베드로 대표] “지금 한국인 선교사님들이 중국뿐만 아니라 러시아 등지에서의 활동이 예전과 달리 북한 주민을 직접 접촉하거나 현장 가까이 접근해서 주민들을 접촉하는 게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죠. 중국은 반간첩법 시행도 하고 러시아 같은 경우는 보안상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고 그래서 조심해야 할 것 같고요.”
한국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문제가 한러 양국의 민감한 쟁점이 된 상황에서 러시아가 백 씨 사건을 한국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려 할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익명을 요구한 북러 관계 전문가는 러시아가 처음부터 한국 압박을 의도한 수사라고 단정할 순 없지만 우크라이나 지원의 중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여기는 한국에 대한 경고 의미를 담고 있는 조치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한국 정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 조한범 박사는 러시아 당국의 이번 한국 선교사 체포는 블라디보스토크 현지의 삼엄해진 감시활동 과정에서 발생한 단순 사건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습니다.
조 박사는 또 만일 러시아가 한국 압박용으로 이를 활용하려 할 경우 한국도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강화 등 대응 카드를 갖고 있다고 부연했습니다.
[녹취: 조한범 박사]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러시아가 급하게 북한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측면이 있지만 그러나 (한러) 양측은 불편하지만 서로 선을 지키는 그런 관계거든요. 그러니까 이걸 토대로 러시아가 만일 한국을 압박한다든지 이렇게 하면 한국 정부도 카드가 많이 있거든요.”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이번 사건은 북러 간 무기 거래와 한국의 우크라이나 지원 등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비정상적으로 변한 한러 관계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며, 간첩 활동에 대한 러시아의 감시가 강화된 상황에서 향후에도 비슷한 사건이 또 터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서울에서 VOA뉴스 김환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