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노동당 최말단 책임자들을 대상으로 한 세포비서 대회에서 ‘고난의 행군’을 결심했다는 표현까지 쓰면서 내부 통제에 공을 들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전문가들은 조 바이든 행정부가 대북정책을 검토 중인 가운데 북한이 대미 갈등의 장기화에 대비하고 있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김환용 기자가 보도합니다.
북한 대외 관영 ‘조선중앙통신’과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 등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8일 제6차 노동당 세포비서 대회 폐회사에서 “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시작해 각급 당 조직들, 전당의 세포비서들이 더욱 간고한 ‘고난의 행군’을 할 것을 결심했다”고 밝혔다고 9일 보도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앞길에 많은 애로와 난관이 가로놓여 있고 이 때문에 8차 당 대회 결정 관철을 위한 투쟁은 순탄치 않다”면서 “그 어떤 우연적인 기회가 생길 것을 절대로 믿지 않고 그 어디에 기대를 걸거나 바라볼 것도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김 위원장의 발언은 대북 제재가 장기화하는 가운데 외부 환경 변화를 기대하지 않고 자력갱생을 위한 내부 조이기를 더 강화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됩니다.
북한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이 ‘고난의 행군’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한 데 대해 외부에서 보기 보다 북한 내부 사정이 훨씬 더 심각함을 반영한 발언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난의 행군’이라는 용어는 김일성 주석이 1938년 말에서 1939년 초 항일 빨치산을 이끌던 시절 만주에서 혹한과 굶주림을 겪으며 일본군 토벌작전을 피해 100여일간 행군한 데서 유래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북한이 1990년대 중.후반 국제적 고립과 자연재해로 수 십만 명의 아사자를 낳았던 최악의 경제난을 겪는 과정에서 체제를 지키고 자신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이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김형석 전 한국 통일부 차관입니다.
[녹취: 김형석 전 차관] “고난의 행군 또는 고난의 시기라는 말은 가급적 쓰지 않으려던 게 김정은 정권 들어서 하나의 흐름이었는데 이런 말을 썼다는 것은 지금의 상황이 엄중한 상황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북한 주민들이 경각심을 갖고 특별한 각오를 가지고 헤쳐나가야 된다, 그런 차원에서 사용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민간 연구기관인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신범철 외교안보센터장도 ‘고난의 행군을 결심’했다는 발언은 북한 내부의 위기의식이 반영된 표현이면서 체제를 걸어 잠근 채 자력갱생에 승부를 걸겠다는 의지를 보다 분명히 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전문가들은 또 경제난의 장기화를 각오해야 하는 북한으로선 당의 최말단 간부부터 고위 간부까지 전 사회적인 사상통제를 강화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김 위원장은 올해 ‘인민대중제일주의’와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에 따른 경제발전을 국가기조로 정한 뒤 연일 간부들을 다잡고 있습니다. 지난 1월 당 대회에서 임명한 당 경제부장을 한 달 만에 교체하고 주요 당 회의에서 고위 간부들에게도 공개적인 지적과 질책을 지속해 왔습니다.
이번 대회에 참석한 당 세포비서는 당의 최말단 조직으로 5∼30명으로 구성된 당 세포의 책임자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김 위원장은 이번 대회에서도 당 세포의 과업 10가지를 제시하면서 당원과 주민에 대한 사상 교육과 통제에 중점을 뒀습니다.
앞서 6일 개회사에서도 언급했던 반사회주의 또는 비사회주의와의 투쟁을 다시금 꺼내 들었습니다.
특히 청년들의 사상 통제가 “최중대사”라며 옷차림부터 언행까지 세세하게 통제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그는 “청년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이 적지 않고 새 세대들의 사상 정신상태에서 심각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라며 “청년 교양 문제를 조국과 인민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한국 정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 조한범 박사입니다.
[녹취: 조한범 박사] “이 세대의 특징은 장마당 세대거든요. 장마당 세대는 배급이 아니라 장마당에서 돈을 벌어서 먹고 사는 그런 가정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에 당과 국가에 대한 충성도가 이전 배급세대보다 현저하게 약해요. 그렇기 때문에 경제 위기에 따른 체제 이완과 더불어서 장마당 세대가 급증하는 데 따라 김정은
유일지배체제 고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대해서 사상투쟁을 강조하는 이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이 직접적인 대외 메시지를 발신하진 않았지만 고난의 행군을 각오하겠다고 밝힘으로써 미국과의 협상에 쉽게 응하지 않고 장기전에 대비하겠다는 의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냈다고 보고 있습니다.
신범철 센터장은 조 바이든 미 행정부의 대북정책 검토가 마무리돼가는 현 시점에서 나온 김 위원장의 이런 발언은 대북적대시 정책을 철회하지 않는, 미국이 원하는 방식의 협상엔 응하지 않겠다는 의미라고 분석했습니다.
[녹취: 신범철 센터장] “미국에선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 검토가 이뤄지고 있다고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이나 블링컨 국무장관의 이야기를 보면 북한이 기대하는 제재 완화 등 이런 부분이 담기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북한으로선 문을 걸어 잠그고 대미 강경노선을 걷겠다, 그런 정책 방향이 결정된 것 같아요.”
한편 세포비서 대회는 지난 6일 개막해 8일까지 사흘간 치러졌습니다. 북한은 세포비서 대회를 5년마다 개최할 예정입니다.
서울에서 VOA뉴스 김환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