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지난달 열린 노동당 대회에서 내놓은 경제정책은 김정은 체제가 처한 딜레마를 드러낸 것이라고 한국 내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불확실한 대외 여건 속에서 변화보다는 안정을 도모했다는 지적입니다. 서울에서 김은지 기자가 보도합니다.
북한은 지난달 36년 만에 열린 노동당 대회에서 향후 5년 간의 경제 부문 청사진을 제시했습니다.
북한이 중장기 경제발전 계획을 발표한 것은 1987년 3차 7개년 계획 이후 29년 만으로, 김정은 체제 들어서는 처음입니다.
이는 당-국가체제 정상화를 통해 과거처럼 경제발전 계획을 세울 만큼 정상화됐음을 대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로 풀이됩니다. 지난달 24일 민화협 주최 강연회에 참석한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입니다.
[녹취: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김정일 시대에 당 대회를 열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경제 위기로 인해 새로운 경제발전 전망을 제시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번 당 대회 개최는 ‘이제는 경제개발 계획을 만들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반영된 것으로 이를 위해 국가 기능 정상화 차원에서 당 대회를 개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당초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에서 예고한 ‘휘황한 설계도’는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또 일부에서 기대했던 중국이나 베트남 수준의 개혁개방 노선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제재 국면을 비롯한 불확실한 대외 여건 속에서 변화보다는 안정을 도모했다는 평가입니다. SK경영경제연구소 이영훈 수석연구원입니다.
[녹취: 이영훈 수석연구원] “지금과 같은 제재 국면에서 북한은 변화 즉, 개혁개방을 진전시키기보다 체제 안정과 유지에 힘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당 대회에서 5개년 전략 발표와 우리식경제관리방법 등을 공식화함으로써 주민들에게 미래에 대한 기대를 심어줘 동요를 막고 대외적으로는 제재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는 선전의 의미가 담긴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 정부 당국자는 당 대회에서 핵 무력에 기반한 권력 공고화에 집중하다 보니 경제를 비롯한 다른 부문에서 변화를 모색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추진해온 경제정책 노선을 공식화하는 수준에 그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시장경제 요소 도입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우리식경제관리방법’ 전면 확립 방침을 밝힌 겁니다.
이에 따라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보여온 시장에 대한 유화 정책 기조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지난달 13일 민화협 주최 북한 당 대회 분석 토론회에 참석한 양문수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입니다.
[녹취: 양문수 교수] “국제사회의 제재가 강화되는 시점에 우리식경제관리방법과 사회주의 기업책임관리제를 재확인하고 공식화한 것은 앞으로‘개방’보다는 ‘개혁’에 무게를 두고 시장을 적극 활용하겠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7.1 조치 때보다 진전된 이원적 국민 경제운영 방식의 공식화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북한이 2012년 이후 점진적으로 추진해온 ‘우리식경제관리방법’은 경제 현장에서의 자율성과 인센티브를 확대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농장과 공장 운영에 있어 시장과 관련된 불법 또는 반합법적 활동의 상당 부분을 합법화함으로써 시장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한국의 전문가들은 북한이 당 대회에서 국가발전 5개년 ‘계획’ 대신 ‘전략’을 발표한 데 주목하고 있습니다.
경제 전반에 대한 상세한 발전 목표를 담은 ‘계획’ 대신 발전 방향에 무게를 둔 ‘전략’이란 표현을 쓴 데는 악화된 북한의 대외경제 여건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입니다.
북한은 과거 당 대회 때마다 구체적인 목표 수치를 담은 중장기 경제발전 계획을 발표해왔습니다.
한국 정부 당국자는 고강도 제재를 비롯해 현재 북한을 둘러싼 대외정세가 워낙 유동적이어서 구체적인 생산 목표를 제시하기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따라 향후 북한이 중국의 지원과 투자 여부를 봐가며 전략에 입각한 구체적인 계획을 발표할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또 다른 한국 정부 당국자는 북한이 리수용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의 중국 방문을 통해 5개년 전략을 중국 측에 설명하고 이에 대한 지원과 협력을 요청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제재 국면이 아니더라도 과거처럼 경제 분야에서 무리한 목표를 제시하지 않는 김정은 체제의 정책기조가 반영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옵니다. 한국 산업연구원 이석기 선임연구위원입니다.
[녹취: 이석기 선임연구위원] “김정은의 입장에선 경제 전반에 대한 국가의 통제능력이 떨어진 상황에서 과거처럼 구체적인 목표 수치를 제시할 경우 5년 뒤 달성하지 못하면 리더십의 타격과 자원 낭비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제재가 아니더라도 지금과 같은 형식으로 발표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향후 북한은 발전이나 농수산업과 같은 현실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분야에서 단계별로 목표수치를 제시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북한이 발간하는 경제잡지도 과거와 다른 김정은 체제의 경제관리 방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북한 경제전문 학술지 <경제연구> 는 지난 시기 국가의 전략적 경제관리 방법은 계획에서 출발했지만 앞으로는 전략을 세우는 사업에서 출발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전문가들은 북한이 이번 당 대회에서 발표한 경제정책은 현재 김정은 체제가 처한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서울대 김병연 교수입니다.
[녹취: 서울대 김병연 교수] “북한이 당 대회에서 밝힌 경제정책은 사회주의 경제와 체제 이행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취할 수 없는, 현재 북한 정책 결정자의 경제에 관한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북한이 원하는 사회주의 경제 복원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장기 성장이 가능한 시장경제로의 체제이행은 김정은 정권에게 리스크가 너무 커서 할 수 없기 때문이죠.”
북한이 36년 만에 열린 당 대회를 통해 명실상부한 김정은 시대를 선포했지만 핵 개발을 지속하는 한 ‘경제강국 달성’이라는 북한의 목표는 구호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한국 전문가들의 관측입니다.
양문수 교수는 북한의 경제정책은 상위 범주의 국가전략인 ‘경제-핵 무력 병진 노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다며 본격적인 경제발전을 추구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북한은 이에 따라 자강력 제일주의를 강조하면서 추가적인 노력 동원을 통한 성과 창출을 독려해 나갈 것으로 전망됩니다. 홍순직 한국 통일연구원 객원연구위원입니다.
[녹취: 홍순직 객원연구위원] “북한은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국면에서 70일 전투에 이어 200일 전투와 같은 노력 동원의 속도전을 강화해 나갈 것으로 전망됩니다. 경제 부문에 있어 생산요소인 토지, 노동, 자본, 기술 가운데 현재 북한이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노동력으로, 결국 노동력 동원을 통한 생산품 향상과 같은 방식으로 당 대회 과업을 관철해 나갈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 정부 당국자는 김정은 체제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사상, 군사 강국에 이어 경제 강국이 되는 것이라며, 김정은이 강조해온 인민생활 향상 여부는 향후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을 결정짓는 핵심 요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서울에서 VOA뉴스 김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