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미국과 한국이 주적이 아니라면서도 국방력 강화를 핵심 국가정책으로 천명하며 핵무력 증강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북한은 또 이례적으로 전람회라는 형식으로 첨단무기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무력시위를 벌였습니다. 서울에서 김환용 기자가 보도합니다.
북한 대외 관영 ‘조선중앙통신’과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당 창건 76주년을 맞아 11일 3대혁명전시관에서 개최한 국방발전전람회 ‘자위-2021’ 기념연설에서 “한반도에 조성된 불안정한 현 정세 하에서 그에 상응한 군사력을 부단히 키우는 게 지상 책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강력한 군사력 보유 노력은 평화적인 환경에서든 대결적인 상황에서든 주권국가가 한시도 놓치지 말아야 하는 당위적인 자위적, 의무적 권리이고 중핵적인 국책으로 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또 “북한 앞에 조성된 군사적 위험성은 10년, 5년 전 아니 3년 전과도 또 다르다”고 진단하고 “우선 강해지고 봐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3년 전인 2018년은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여를 계기로 ‘한반도의 봄’이 조성된 시기로 이후 2019년 4월 하노이에서 2차 미-북 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지금까지 미-북, 남북 관계는 교착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김 위원장은 이와 함께 자신들의 주적은 전쟁 그 자체이지 미국이나 한국 등 특정 국가 또는 세력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또 한국을 겨냥해 국방력을 강화하는 게 아니라면서 동족끼리 무장을 사용하는 끔찍한 역사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그러나 미국을 한반도 정세 불안정의 근원이라며 “미국이 최근 들어 북한에 적대적이지 않다는 신호를 빈번히 발신하고 있지만 적대적이지 않다고 믿을 수 있는 행동적 근거는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한국에 대해선 스텔스 전투기와 고고도 무인정찰기 도입, 미-한 미사일 지침 개정 이후 미사일 개발 등을 일일이 언급하며 도를 넘은 노골화된 군비 현대화 시도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이 군비 현대화 명분으로 ‘대북 억지력’을 내세우고 북한의 무기 개발을 ‘도발’로 규정하는 것은 강도적인 이중적 태도라며, 북한의 자위적 권리를 훼손하려고 할 경우 용납하지 않고 행동으로 맞서겠다고 경고했습니다.
한국 정부는 김 위원장이 한국의 자신들에 대한 ‘이중기준’을 비난한 데 대해 남북대화를 통해 이견을 해소하자는 입장을 거듭 밝혔습니다.
통일부 당국자는 12일 “남북관계라는 게 어느 일방의 기준을 일방적으로 요구, 관철하는 방식으로 풀기 어렵다는 게 정부의 기본 생각”이라며 “그간 마련된 여러 남북 간 합의를 기준으로 대화와 협력을 통해 이중기준과 관련한 이견과 입장차를 해소해 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한국 정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 홍민 박사는 김 위원장이 미국과 한국을 주적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국방력 강화를 지속하겠다고 밝힌 것은 동아시아의 군비경쟁 상황을 자신들의 핵무력 증강 활동의 명분으로 활용하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홍민 박사] “다 하고 있기 때문에 나만 안 하는 것은 주권국가로서의 자위권 행사를 나만 제약당하고 있다는 논리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고, 주변국가들이 개발하고 있는 무기 규모나 장비 수준을 보면 냉전 시기를 이미 뛰어 넘은 지 오래됐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북한이 보기엔 그런 것을 배경으로 해서 자신들의 무기 개발의 명분을 포괄적인 전쟁억지력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거죠.”
홍 박사는 김 위원장이 국방력 강화의 당위성을 집중적으로 주장한 연설 기조로 볼 때 미국의 조건 없는 대화 제의에 쉽게 응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고 풀이했습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김 위원장이 지난달 29일 최고인민회의에서 행한 시정연설 내용을 이번에 보다 구체적이고 공세적인 태도로 재확인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박 교수는 미국이나 한국에 국한하지 않고 주변국 군비경쟁 프레임을 내세워 북한의 핵 보유를 정당화하려는 게 김 위원장 연설의 핵심이라며, 특히 한국을 약한 고리로 ‘이중기준’ 문제를 압박했다고 분석했습니다.
[녹취: 박원곤 교수] “한국이 문제 제기를 안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죠. 왜냐하면 한국이 북한의 위협에 가장 직접적으로 노출된 국가 아닙니까. 그런데 한국이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북한의 그런 핵 개발에 대해서 국제사회가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운 상황이 오는 거거든요. 북한이 그걸 노리고 있다, 단순히 자신들의 것들을 받아들이라는 게 아니라 구체적 행동으로 나타내라고 계속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김정은 위원장 집권 이후에도 ‘철천지 원쑤’라며 적대시 했던 미국을 김 위원장이 직접 주적이 아니라고 언급한 것은 협상 의지를 보인 행동이라는 관측도 나옵니다.
한국 국책연구기관인 국방연구원 출신 김진무 숙명여대 교수는 김 위원장의 발언은 문재인 한국 대통령이 제안한 종전선언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내비친 것으로 보인다며 국제사회에 북한이 평화를 지향한다는 이미지를 심어주려는 의도도 깔려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한편 북한이 이번에 개최한 국방발전 전람회는 당 창건 76돌을 맞아 기획된, 열병식을 대신한 새로운 방식의 무력시위로 보입니다.
‘조선중앙통신’은 전람회에 지난 5년간 개발한 무장장비들이 전시됐으며 김 위원장이 이 행사를 “대규모 열병식에 못지않은 일대 국력시위”로 선언했다고 전했습니다.
전람회에는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6형’과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SLBM) ‘북극성 5ㅅ형’, 극초음속 미사일 ‘화성-8형’, 신형 단거리 탄도미사일 등이 전시됐습니다.
한국 국방부는 “전람회를 통해 공개된 장비 등에 대해서는 미-한 정보당국이 분석 중에 있으며 지속적으로 면밀히 확인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통일연구원 조한범 박사는 김 위원장이 연설을 통해 협상 여지를 남겨놓으면서도 전람회를 통해선 핵무력 증강 의지를 동시에 보여줬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조한범 박사] “일단 협상 의지는 분명히 보이는 것이고요. 그러나 전람회를 통해서 북한은 사실 단거리부터 중거리, 장거리까지 각종 탄도미사일에 모두 핵탄두 탑재가 가능하다는 식별 표시를 의도적으로 노출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미국에게 대화는 하겠지만 본인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핵무력을 고도화하겠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고요.”
김진무 교수는 북한의 이례적인 국방전람회 개최는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행사라는 점에서 자신들의 무기 개발이 정상적인 자위력 강화 차원의 활동임을 부각시키려는 계산된 조치라고 분석했습니다.
[녹취: 김진무 교수] “대규모 열병식은 두 가지 차원에서 문제가 있죠. 하나는 굉장히 호전적으로 보이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인권 문제가 국제사회에서 심각하게 논의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문제들은 김정은 정권의 독재성을, 억압성을 부각시키는 효과 밖에 없었단 말이에요. 그런 것들을 상쇄하면서도 자기들이 대외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것을 다 보여주는 그런 효과를 얻고자 한 거죠.”
전람회에는 정치국 상무위원들인 최룡해, 조용원, 김덕훈, 박정천 등 주요 간부들이 참석했으며 김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당 부부장과 김 위원장의 의전을 맡은 현송월 당 부부장도 전람회장을 돌아보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됐습니다.
서울에서 VOA뉴스 김환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