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주요 뉴스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보는 ‘쉬운 뉴스 흥미로운 소식: 뉴스 동서남북’ 입니다. 북한이 외무성 담화를 통해 한국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의 방북을 불허했습니다. 남북관계와 관련해 대남 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나 통일전선부가 아닌 외무성이 입장을 밝힌 것은 이례적인 일입니다. 최원기 기자가 전해 드립니다.
한국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의 방북을 불허한 북한의 담화와 관련해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발표의 주체입니다.
현 회장이 금강산 방문을 위해 북한 주민 접촉 신고를 한국 통일부에 제출한 직후, 북한은 통일부의 승인 여부가 결정되기도 전인 지난 1일 ‘외무성 김성일 국장’ 명의의 담화를 내놨습니다.
김 국장은 담화에서 “남조선의 그 어떤 인사의 입국도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방침”이라며 “우리 국가에 입국하는 문제에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는 아무런 권한도 행사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앞서 현 회장은 남편인 정몽헌 회장 사망 20주기 추모식을 위해 금강산을 방문하기 위해 북한의 아태와 접촉할 계획이라고 신고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한국의 북한 전문가인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외무성이 담화를 낸 것은 남측을 적대국가로 상대하겠다는 얘기”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임을출 교수] ”남쪽과의 관계는 민족과의 관계가 아니라 적과의 관계, 적대국가 관계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외무성이 입장을 발표한 것이 아닌가.”
한국 정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 조한범 박사는 북한이 “입국”이라는 단어를 썼다는 점에서 국가 대 국가 관계를 적용하려는 것일 수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조한범 박사]”원래 남북관계는 입경, 출경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입국이라는 표현을 썼어요, 또 외무성이고, 입국이라는 표현, 외국과의 관계를 준용하려는 것 아니냐.”
지난 1991년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한을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북한과 대화할 때 한국은 외교부가 나서지 않고 통일부가 대표가 됐던 겁니다.
북한도 외무성이 아닌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나 노동당 산하 통일전선부(통전부), 또는 아태가 대남 관계를 맡아왔습니다.
같은 이유로 한국 사람이 북한을 방문할 때는 비자, 즉 입국사증을 받는 것이 아니라 ‘북한 방문 증명서’를 발급 받았습니다.
북한이 한국을 ‘국가 대 국가 관계’로 다루기로 한 것이라면 앞으로 한국민이 평양을 방문할 경우 비자를 받는 등 북한 외무성이 관장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북한 외무성 담화에 나오는 “금강산관광지구는 조선민주주의인민 공화국 령토의 일부분”이라는 표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한범 박사는 북한이 외무성 성명을 낸 것은 한국 현대그룹이 맺은 금강산 관광 합의와 계약을 무효화하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조한범 박사] ”현대가 금강산에 투자를 할 때 북한의 아태평화위원회와 계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외무성은 아태가 아무런 권한이 없다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현대와 아태가 맺은 계약을 원천무효화 할려는 속셈이 아닌가.”
한국의 현대아산 그룹이 주도하던 금강산 관광은 이미 15년째 중단 상태입니다.
북한은 2019년부터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지시로 금강산관광지구 내 문화회관 건물과 온정각 등 한국 측 시설들을 철거했습니다.
여기에 지난해 5월에는 해금강호텔까지 완전 해체된 것이 위성사진을 통해 확인됐습니다.
금강산 관광지구에는 현대아산 등이 4천200억원(3억2천만 달러), 한국 정부가 600억원(4천500만 달러)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국 정부는 금강산 내 시설 무단 철거에 대해 “북한의 위법 행위를 강력하게 규탄하며, 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북한에 있다”는 입장입니다.
북한 내부에서 대남 기구가 힘을 잃었기 때문에 외무성이 담화를 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평양을 오래 관찰해온 켄 고스 미 해군분석센터 국장은 지난 몇 년 간 대남 관계를 다뤄왔던 통전부가 힘을 잃은 반면 김여정 부부장과 최선희 외무상이 관장하는 외무성은 관할 범위를 넒혔다며, 이번 조치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같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켄 고스 국장] ”Couple of years United Front Dept dropped in terms of role and function…”
그런데 지난 2021년 3월16일 대남 관계를 총괄하는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담화를 내고 “현 정세에서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어진 대남 대화 기구인 조평통을 정리하는 문제를 일정에 올려놓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언급했습니다.
그 후 실제로 조평통이 해체됐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통전부도 지난 3년 간 남북관계에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또 북한 외무성은 이번 담화에서 금강산 관광을 주도해왔던 아태가 “아무런 권한도 행사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탈북민 출신인 한국 정부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김광진 연구위원은 조평통을 비롯한 대남 기구들이 노동당 조직지도부의 가혹한 검열을 받고 해체되거나 권한을 잃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김광진 연구위원] ”김여정이 조평통 포함해 개편하거나 없애겠다고 했으니까, 기구 개편이 있었겠죠, 노동당 조직지도부 기구과가 총괄하고 김정은의 승인을 받았을 겁니다.”
전문가들은 현재의 남북관계가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된 2020년 6월16일 상황의 연장선에 있다고 말합니다.
당시 북한은 탈북민들의 대북 전단 살포를 문제 삼아 연락사무소를 폭파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행동의 배경에 한국에 대한 불만과 좌절감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다시 임을출 교수입니다.
[녹취: 임을출 교수] ”한국 정부가 미국의 제재 고수 방침을 전혀 바꾸지 못하는 상황에서 한국과의 대화 접촉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남북관계를 전면 재설정해야 한다. 결국 개성의 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거죠.”
북한 김정은 위원장은 한국 문재인 대통령과 2018년 4월부터 9월까지 판문점과 평양에서 세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남북한은 비핵화, 종전 선언, 철도 연결, 경제협력, 이산가족 상봉 등에 합의했습니다.
2018년6월 싱가포르에서 열렸던 1차 미북 정상회담까지는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열린 미북 2차 정상회담이 실패로 끝나면서 분위기는 180도 변했습니다.
북한은 하노이 회담 실패의 책임을 물어 김영철 통전부장을 해임했고, 조평통과 아태 등 대남 부서를 없애거나 축소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북한은 회담 실패의 책임을 한국에 떠넘겼습니다.
새로 대남 부서를 맡은 김여정 부부장은 2020년 3월 한국 문재인 대통령을 빗대 “겁먹은 개”라며 막말을 퍼부었습니다.
이어 6월16일에는 개성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습니다.
조한범 박사는 북한이 한국을 겨냥해 일종의 ‘화풀이’를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이 실패한 데 대한 책임을 책임을 한국에 돌리고 있다는 겁니다.
[녹취: 조한법 박사] ”그게 북한의 전통적인 방식인데, 약한 고리 때리기라고 해서, 불만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있겠지만, 북미관계에서 북한이 열세거든요. 한국 속담대로 애먼데 가서 화풀이 하는 거죠.”
2020년 6월 공동연락사무소 폭파로 상징되는 남북한의 험악한 분위기가 3년 이상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대남 정책이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에서 국가 대 국가 관계로 전환할지 주목하고 있습니다.
VOA 뉴스 최원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