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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의 세상보기] 북한인권국제연대 문국한 대표


[탈북민의 세상보기] 북한인권국제연대 문국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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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우연히 탈북 가족을 만나 20여 년 동안 꾸준히 북한 인권의 현실을 알려온 '북한인권국제연대' 문국한 대표. 최근에는 그가 보호하고 구출한 '장길수 가족'의 이야기가 담긴 북한인권전시회를 열었는데요. 탈북민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탈북민의 세상 보기', 오늘은 북한인권국제연대 문국한 대표의 얘기 전해드립니다.

중국에서 우연히 탈북 가족을 만나 20여 년 동안 꾸준히 북한 인권의 현실을 알려온 ‘북한인권국제연대’ 문국한 대표. 최근에는 그가 보호하고 구출한 ‘장길수 가족’의 이야기가 담긴 북한인권전시회를 열었는데요. 탈북민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탈북민의 세상 보기’, 오늘은 북한인권국제연대 문국한 대표의 얘기 전해드립니다. 서울에서 동예원 기자입니다.

[녹취: 문국한 대표] “길수하고 길수 형이 주로 많이 그리고 외삼촌, 세 사람이 주로 많이 그렸습니다. 다 특색이 있어요. 길수 형은 진짜 화가입니다. 여기 보시면 아주 디테일하게 구체적으로 잘 그렸어요. 그래서 잘 그렸다고 생각하는 건 길수 형이고 좀 투박하게 그린 것은 길수 소년, 당시 15살이거든요. 길수 소년이 그린 거고 제목은 ‘18살 처녀의 모습’인데 이렇게 헐벗고 굶주리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고요.”

‘북한인권국제연대’의 문국한 대표가 장길수 가족이 그린 그림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문국한 대표가 장길수 가족을 처음 만난 때는 1999년이었는데요. 문구 사업을 위해 중국을 방문했다가 한 조선족 여성을 통해 길수 가족과 친척을 소개받은 겁니다. 그때부터 긴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녹취: 문국한 대표] “저희 단체는 한 20년 됐네요. 1999년에 장길수 소년을 중국에서 만나서요. 15명의 가족이 온 것을 알고 그때부터 이 가족들을 어떻게 할까? 하다가 모두 한국에 가고 싶은 소망이 있으니까, 한국을 보내려고 노력하다가 가족들이 은신처 생활을 한 3년 동안 하다 보니까 무료하잖아요. 그래서 청소년들도 있으니까 그림을 그리게 하고 또 일기를 쓰게 하고, 마치 ‘안네의 일기’처럼….”

문 대표는 길수 군과 그의 가족이 경험한 북한의 인권 실태를 글과 그림으로 세상에 알리고자 했는데요.

[녹취: 문국한 대표] “같은 해 서울에서 ‘제1회 NGO세계대회’가 열렸습니다. 잠실 체조경기장에서 크게 열렸죠. 전 세계에서 많이 왔더라고요. 거기다가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출품하려고 갔는데 신청을 못 했어요. 사정이 있어서, 그 관계자한테 이거 어디서 전시하면 좋겠냐고 하니까 부스는 못 들어오고 밖에 장소 많으니까 거기 넓잖아요. 올림픽 경기장 그쪽에 전시하려고 보니까 비가 왔습니다. 이게 크레용 그림이고 종이에다 그린 거니까 비가 와서 안으로 왔는데 한 곳이 딱 비어 있더라고요.”

비가 온 덕분에 전시장 안에서 작품을 전시할 수 있었는데요. 북한 실상을 그린 장길수 가족의 그림은 여러 부스 가운데서도 많은 화제를 모았습니다.

[녹취: 문국한 대표] “며칠 있다 신문에 났어요. 여기 NGO(대회)가 한 170개 부스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곳이라고 기사를 냈거든요. 그때부터 방송에서는 물론 라디오 방송 또 신문에서 계속 이걸 행사 기간 내보낸 겁니다. 그래서 유엔에 가서 전시를 좀 해야 하겠다. 그래서 유엔 본부 밑에서 전시도 하고 그러면서 전시로 알려야 되겠구나. 북한 인권을, 왜냐하면 여기 장길수 가족 보고 ‘너희들이 경험한 것을 그려라. 그대로.’ 여기 있는 그림들이 다 경험했던 이야기예요.”

그렇다면 장길수 가족이 북한에서 경험하고 보고 들은 것은 무엇일까요?

[녹취: 문국한 대표] “전부 다 하나같이 그냥 굶어 죽는 이야기, 공개 처형 이야기, 체제가 엉망인 얘기만 하는 거예요. 보고 듣는 게 그거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그런 그림이 대부분입니다. 식량 몇 kg 훔쳤다 해서 수천 명이 보는데 공개 처형하고 군인도 저기 보면 배가 고파서 집단 농가에서 감자를 훔쳐다가 민가에 와서 삶아 먹고 그런 그림이죠. 또 저기 보면 재밌는 게 전깃불이 오는데 명절 공급, 전깃불도 1년에 몇 번만 온다는 믿어지지 않는 얘기인데 뭐 그렇게 살았으니까. 그래서 결국은 탈출하죠. 탈출해서 저희를 만난 거죠. 중국에서….”

장길수 가족이 탈북하던 때는 북한, 고난의 행군 시기였고요.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외가의 일가족이 모두 탈북했습니다. 문 대표와 장길수 가족은 그렇게 연길에서 만났죠.

[녹취: 문국한 대표] “꽃제비들이 들락날락할 때 그때는 오늘 강 건너면 내일 또 들어갔다가 잡히면 며칠 있다가 또 나오고 그런 탈북자들이 탈출했던 초기인데… 형제하고 어머니하고 네 가족이고 다 일가들이에요. 외갓집의 일가들이죠. 그래서 인연이 되면서 그림 그려봐라. 이게 뭐냐 하면 얘가 경험했던 거예요. 아무것이나 먹고 죽지 말고 살자고 했는데 한쪽에는 뱀이 불에 구워져 있고 저쪽 그릇에는 여러 가지 파충류가 있어요. 이걸 그렸어요. 그래서 이걸 전시하고 소개했더니만 제목을 번역한, ‘운 좋은 남자’라고 그랬어요. ‘럭키맨’, 다 굶주려 죽고 있는데 여기는 먹을 게 많잖아요. 그래서 계속 언론에도 알려지고 하면서 첫 번째로 세계 언론에 난 그림이 저거라 인상이 제일 남죠.”

문 대표는 그렇게 3년 동안 장길수 가족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그들의 은신처를 마련해주고 식량도 구해줬는데요. 그곳에서 그린 그림을 보니 색깔이 참 다채롭습니다.

[녹취: 문국한 대표] “그 은신처에 있을 때 3년간 있었거든요. 1999, 2000, 2001년에 나왔으니까 3년 동안 그린 그림하고 일기… 은신처에서 뭘 합니까? 나가지도 못하게 하니까 일기 써야 하죠. 그림은 한 시기에 많이 그렸어요. 크레파스하고 종이를 갖다주니까 처음 만져보는 거예요. 크레용을, 지금 화려하죠. 보면 색깔을 다양하게 썼잖아요. 그러니까 다양하게 만지고 싶은 거예요. 내용은 참 비참한 건데 먼 데서 이렇게 보면 화려하다고요.”

그렇게 문 대표는 장길수 가족이 무사히 한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끊임없이 모색했습니다.

[녹취: 문국한 대표] “그게 계기가 돼서 다른 일을 할 수 없더라고요. 가만히 보니까 가장 귀한 일이 사람 살리는 것을 몸으로 느꼈어요. 이거보다 더 귀한 일이 있을까? 방송국에 얼마 전에 출연했거든요. 가족이 있느냐고 묻더라고요. 나도 있다, ‘그런데 15명 가족을 거기 3년 동안 먹여 살리고 탈출시키고 하는데 집에서 가만히 있느냐?’ ’어쩌겠냐, 집에는 먹을 게 있고 그래도 자유롭게 살지만 15사람 가족은 지금 생사가 오락가락하는데 지금 위험에 빠진 자식들을 돌봐야 하는 게 아니냐?’ 그 말을 무심코 던졌죠. 그래서 나 콩깍지가 씌었다. 콩깍지가 안 씌워지면 그건 못하죠.”

결국 2001년 6월, 문 대표는 장길수 가족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그들을 베이징 시내에 있는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베이징 사무소에 진입시킨 건데요.

[녹취: 문국한 대표] “너무나 기쁜 거예요. 내가 죽어가는 사람, 저 사람들을 살려냈다니 이거보다 더 귀한 게 어디 있냐? 이걸 세상에 좀 알리자. 사람이 제일 귀하다는 걸 알리는데 어떻게 알리냐, 그림을 통해서, 북한이 이런 나라다. 이런 데도 같은 동포로서 가만히 두겠느냐? 저는 현장에서 체험하다 보니까 벌써 몇 달 지나가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사람들 내팽개칠 수 없잖아요. 그때부터 큰아버지라고 따르고 15명이나 그 어른 60 넘은 사람 또 어린애부터 청소년 이렇게 있는데 전부 다 자식으로 보이는 거예요. 그게 콩깍지가 씐 거지 분명히. 그래서 우리가 북한 동포를 볼 때 동포라고 하지 말고 내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다 미칩니다. 그때부터 뭐 이거 관리하고 세상에 알리고 하는 게 돼 버려서…”

하지만 장길수 가족 가운데 한국으로 못 온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장길수 씨의 어머니인데요. 그 당시 중국 식당에서 일을 했는데, 식당 주인의 신고로 중국 공안에 잡혀 북송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장길수 씨는 여전히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녹취: 문국한 대표] “캐나다에서 사업하고 있는데 길수가 ‘내가 어머니 소식을 알면 천만금을 주더라도 내가 구해 오겠다…’ 그렇잖아요. 한 10년 만에 제가 갔거든요. 큰아버지 좀 와달라고 그래서, 표정이 아주 그 묘한 표정이에요. 아직도 어머니가 살아계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걸 아주 묘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그래서 그거 생각하면 목이 메는데… 근데 20년이 넘도록 계속 엄마 구출할 생각 하니까 기가 막힌 거죠.”

문국한 대표는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을 보이기도 했고요. 앞으로도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국제사회를 움직이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전했습니다. 그렇다면 ‘북한인권국제연대’에서는 주로 어떤 활동을 할까요?

[녹취: 문국한 대표] "이게 소수로 하고요. 주로 여기 탈북자들하고 많이 인연이 돼서 그 사람들 심리 상담도 해주고 어려움이 많아요. 어디 하고 싶어도 말을 못 하죠. 그런데 큰아버지라고 그러니까 뭔가 이렇게 느껴지잖아요. 그러니까 거기서 친근감이 생기고 어려우면 상담해 주고 또 정부 지원도 받게 하고 그런 일을 하고, 한편으로 이걸 국제사회에 알리는 일을 계속 지금 하죠. 20년이 넘도록…."

끝으로 문국한 대표는 평화통일이 되기 위해서는 북한 인권에 관한 한국 시민의 관심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서울에서 VOA 동예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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