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연설에서 미국에 대한 거친 표현을 자제하면서도 열병식에선 신형 전략무기들을 공개하는 이중적인 행보를 보였습니다. 전문가들은 미 대선 전까지 도발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이면서 동시에 미 차기 행정부를 겨냥해 무력시위를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김환용 기자가 보도합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0일 노동당 창건 75주년을 맞아 행한 열병식 연설에선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었습니다.
5년 전 당 창건 70주년 열병식에서 자신들의 “혁명적 무장력은 미제가 원하는 그 어떤 형태의 전쟁에도 다 상대해 줄 수 있다”고 한 것과 대조적입니다.
김 위원장은 이번 연설에선 “적대세력의 핵 위협 등에 맞서 전쟁 억제력을 강화하겠다”면서 특히 “이런 전쟁 억제력이 결코 남용되거나 절대로 선제적으로 쓰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연설 기조에 대해 북한이 다음달 3일 대선을 앞둔 미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수위 조절에 신경을 많이 쓴 결과로 보고 있습니다.
한국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조성렬 박사는 정당방위 수단으로서의 핵 억제력 강화라는 기존 논리를 반복하면서도 선제 공격 의사가 없음을 유난히 강조함으로써 절제된 대미 메시지를 발신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조 박사는 북한이 그러면서도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과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 SLBM의 신형 모델을 공개한 것은 대선 이후 미국의 차기 행정부를 겨냥한 시위라고 풀이했습니다.
[녹취: 조성렬 박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ICBM이나 SLBM 같은 신형 전략무기를 선 보인 것은 미국에 대한 자극보다는 만약에 북한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땐 미 대선 이후 미국의 대외전략 수립 과정에서 북한 문제가 뒤로 밀려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반영된 것 같습니다.”
민간 연구기관인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신범철 외교안보센터장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을 내심 바라면서 대미 메시지를 순화시킨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신 센터장은 그러나 신형 전략무기 공개는 단순한 시위를 넘어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이 되든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새로 뽑히든 미국의 차기 행정부와의 협상이 순조롭지 않을 경우 실제로 시험발사에 나설 수 있다는 점을 압박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조성렬 박사] “트럼프가 되면 조속한 정상회담을 요구할 것으로 보이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연말 연초에 ICBM 시험발사가 가능하다고 보고 또 바이든이 당선되면 약간 시간이 더 걸리고 북한의 셈법대로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바이든 행정부의 행보에 따라서 북한이 자신들의 우선순위를 높이기 위해서 ICBM을 발사할 수 있다는 거죠.”
김 위원장은 30여분간 이어진 긴 연설 가운데 한국에 대해선 비록 한 문장에 불과한 짧지만, 우호적인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김 위원장은 “사랑하는 남녘의 동포들에게도 따뜻한 마음을 보내며 하루빨리 이 보건 위기가 극복되고 남북이 두 손을 마주잡는 날이 찾아오기를 기원한다”고 밝힌 겁니다.
한국 청와대는 11일 국가안전보장회의, NSC 긴급 상임위원회 회의 후 “환경이 조성되는 대로 남북관계를 복원하자는 북한의 입장에 주목한다”며 긍정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통일부도 북한의 유화적 메시지에 대해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발전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는 입장을 내놨습니다.
통일부는 하지만 ‘북한 서해상 한국 해양수산부 공무원 피격 사건’에 대한 공동조사에 응하지 않고 있는 북한에 대해 한국 내 여론이 악화된 상황에서 신중한 면모도 보였습니다.
여상기 통일부 대변인입니다.
[녹취: 여상기 대변인] “정부는 인도적 협력과 보건 분야의 협력에 있어서 북한과 협력할 준비가 언제든 돼 있고 또 이를 공개적으로 여러 차례 밝혀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구체적으로 무슨 제안을 하거나 추진할 수 있는 그런 단계는 아니고 향후 환경 조성 시 추진할 수 있도록 준비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한국 정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 조한범 박사는 김 위원장의 메시지에 한국 공무원 피살 사건이나 개성 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건이 자신의 뜻이 아니었음을 한국 국민들에게 간접적으로 전하려는 의도가 들어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조 박사는 또 김 위원장이 미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고 한국과의 관계 복원에 나설 뜻을 내비친 것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조한범 박사] “하노이 이후 북한이 선미후남, 미국과의 관계를 트고 그 다음에 남쪽으로 가겠다는 전략을 지속해왔다고 보면 바이든이 된다고 하면 북-미 비핵화 협상은 기약이 없거든요. 김정은 위원장은 시간은 우리편이라고 했지만 거꾸로 시간이 없죠. 그러면 다시 남북관계가 중요해지는 겁니다.”
조성렬 박사는 그러나 이번 대남 메시지는 한국 정부가 아닌 한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보낸 것으로, 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 향후 전개될 상황의 불확실성을 감안해 일단 한국의 악화된 대북 여론을 달래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며, 조기에 한국과의 협력에 나서려는 의도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조성렬 박사] “남한 당국에 대한 메시지가 아니라 남한 주민에 대한 메시지였거든요. 북한 입장에서 보면 한국사회가 여론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기 때문에 지난번 어업지도사 사망 사건 때도 빠른 사과를 했고 이번 과정에도 보면 당장 남북교류를 준비하려고 한다기 보다는 일단 이후에 대비하는 성명이 아닌가 싶습니다.”
조성렬 박사는 김 위원장이 이번 연설 내내 극존칭을 사용하며 주민들에게 감사와 신뢰를 강조한 데 대해 애민 지도자로서의 이미지 연출이지만 대북 제재와 신종 코로나, 자연재해 등 삼중고의 경제난 속에 이렇다 할 민생 측면의 성과를 보여주지 못한 초조함도 깔려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조 박사는 북한이 내년 1월 8차 당 대회를 목표로 내부정비에 치중하면서 이달 말로 예정돼 있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5차 전체회의와 11월 미국 대선 결과를 지켜보며 향후 대외정책 노선을 구체화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서울에서 VOA 뉴스 김환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