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핵 무력 정책을 헌법에 명시해 핵 무력 강화를 국가가 추구할 기본 방향으로 규정했습니다. 비핵화 문제가 협상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기정사실화하는 한편 신냉전 구도를 십분 활용해 반미연대를 구축하려는 의지도 노골화했습니다. 서울에서 김환용 기자가 보도합니다.
북한 대외관영 ‘조선중앙통신’과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9차 회의가 26일과 27일 이틀간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진행됐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참석해 연설했다고 28일 보도했습니다.
북한은 이번 회의에서 핵 무력 정책을 헌법에 명시했습니다.
보고자로 나선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핵 무력의 지위와 핵 무력 건설에 관한 국가활동 원칙을 공화국의 기본법인 사회주의 헌법에 규제하기 위해 헌법수정보충안을 심의채택한다”고 밝혔습니다.
구체적으로 “핵 보유국으로서 나라의 생존권과 발전권을 담보하고 전쟁을 억제하며 지역과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기 위해 핵무기 발전을 고도화한다”는 내용과 “공화국 무장력의 사명이 국가주권과 영토 완정, 인민의 권익을 옹호하며 모든 위협으로부터 사회주의제도와 혁명의 전취물을 사수하고 조국의 평화와 번영을 강력한 군력으로 담보하는데 있다”는 내용이 헌법에 담겼습니다.
기존 헌법 서문에 이미 ‘핵 보유국’이라는 내용이 명시되긴 했지만 이번에는 핵무기 개발의 목표와 방향성을 비교적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명시했다는 데 차이점이 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연설에서 “국가 최고법에 핵 무력 강화 정책기조를 명백히 규제한 것은 가장 정당하고 적절한 중대 조치”라며 “핵무기 생산을 기하급수적으로 늘이고 핵타격수단들의 다종화를 실현하며 여러 군종에 실전배비하는 사업을 강력히 실행”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북한의 이번 조치는 지난해 9월 최고인민회의에서 핵 무력 정책을 법령으로 채택하고 ‘불가역적인 핵 보유국 지위’를 공표한 데 이어 사실상 핵 무력 발전정책을 영구화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한국 통일부는 북한이 “핵 포기 불가와 핵 능력 고도화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본다”며 “미한일의 압도적 대응과 국제사회의 공조 하에 제재와 압박을 강화해 북한의 핵 개발을 억제하고 단념시켜 나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전문가들은 핵 무력 강화를 헌법에 명시하는 경우는 전 세계적으로 없는 일이라며 북한이 핵 무력 강화를 헌법상 국가가 추구할 기본 방향으로 규정한 것은 비핵화 문제가 협상 대상이 아님을 대내외에 기정사실화하려는 의도로 보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 홍민 선임연구위원입니다.
[녹취: 홍민 선임연구위원] “국내외적으로 더 이상 비핵화를 운운하는 것 자체를 아예 거론하지 못하게 차단하고 또 핵무기를 개발하고 보유하는 데 대한 더 이상 시비, 거기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도록 사실상 쐐기를 박는, 기정사실화하는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가는 것이다라고 생각이 들고.”
홍 선임연구위원은 국내적으로는 이후 세대가 바뀌고 정세가 바뀌어도 핵무기를 흥정이나 협상 대상으로 삼지 말 것과 핵무기 고도화를 위한 자원 집중의 법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차원의 조치로 평가했습니다.
김형석 전 한국 통일부 차관은 북한 정권이 내세울만한 경제 성과가 없는 상황에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를 부르는 핵 무력 강화 정책에 대한 내부의 시비를 차단하고 주민들을 결속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김형석 전 차관] “내부에서 그럴 것 아니에요. 이런 식으로 밖으로부터 이렇게 압력이 들어가는데 핵을 그대로 가져가야 하는가 이런 게 내부에서 있을텐데 이제 그런 생각하지 말라, 이것은 우리 생존권과 발전권을 위해서 가는 것이고 핵을 개발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생존하고 있는 것이지 핵이 없으면 안된다라는 것으로 해서 다른 생각하지 말라라는 내부적인 효과가 있는 것 같고요.”
김 위원장은 또 연설에서 현 국제정세를 들어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기조를 분명히 하고 외교적으로는 반미연대를 구축하겠다고 강조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미한 핵협의그룹 가동, 합동군사연습 재개, 핵 전략자산의 한반도로의 상시배치 수준 전개, 그리고 미한일 안보 협력을 ‘아시아판 나토’라고 언급하며 공화국에 대한 핵 전쟁 위협이 극대화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과 서방의 패권전략에 반기를 든 국가들과의 연대를 가일층 강화”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신냉전 구도’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외교전략을 노골화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특히 김 위원장이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미국과 대립하고 있는 러시아를 방문해 정상회담을 갖고 군사,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북러 간 협력을 강화키로 합의하면서 반미국가와의 연대에 박차를 가하는 양상이라는 관측입니다.
통일연구원 조한범 선임연구위원입니다.
[녹취: 조한범 선임연구위원] “김정은 위원장이 지난해 12월 현 국제정세를 신냉전 구도로 이미 규정했거든요. 그리고 쿠바라든지 베트남, 라오스, 공산권 이런 국가와의 연대를 강화해 왔고 결정적인 계기가 푸틴 대통령과의 북러 정상회담이거든요. 그렇게 보면 북한이 북한판 가치연대를 하고 있다, 북한판 가치연대가 북러 관계 개선을 중심으로 더 확산되는 분위기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북한은 또 이번 회의에서 위성 발사를 담당하는 국가우주개발국을 국가항공우주기술총국으로 격상하기로 했습니다.
잇단 군사정찰위성 발사 실패로 체면을 구긴 상황에서 위성과 로켓의 개발과 발사를 책임지는 조직을 확대개편함으로써 위성 발사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보입니다.
홍민 선임연구위원은 항공기 제작 관련 별도 조직이 없었던 북한이 위성 개발은 물론 항공기 개발까지 포괄한 조직을 만든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최근 우주와 항공 분야에서 협력키로 한 러시아와의 약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구체 조치로, 향후 러시아로부터 항공기 기술을 지원받을 것을 염두에 두고 이뤄진 조직의 확대개편이라는 겁니다.
한편 이번 회의에서는 김 위원장의 공개 질책을 받아 경질 가능성이 점쳐졌던 김덕훈 내각총리에 대해 별다른 인사 조처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김 내각총리는 지난달 말 안석 간석지 피해 복구 현장을 찾은 김 위원장으로부터 재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책임으로 높은 수위의 비난을 들었지만, 최근 농업 현지지도 등 여러 공개 활동을 통해 건재함을 보여줬습니다.
한국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김인태 수석연구위원은 김 위원장의 경우 선대 지도자들과 달리 자신이 신임해 온 인물들에 대해 일시적인 징계는 내리지만 아주 내치지는 않는 인사스타일을 보여왔다며 인재 풀을 지나치게 제한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김인태 수석연구위원] “대체로 당정군 핵심 요직에 들어간 인물들을 보면 집권 초기부터 인정했던 사람들을 끝까지 데리고 가는 건데 일각에선 긍정적으로도 평가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통치방식에서 인재풀이 좁다는 이런 게 반영된 것일 수 있거든요.”
조한범 선임연구위원은 김 위원장이 내각의 책임자 색출과 당적, 법적 처벌을 언급한 만큼 비공개로 숙청 작업이 진행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며 김 내각총리에 대해서도 경제 부문에 대한 연말 결산이 이뤄지고 난 후 문책을 당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서울에서 VOA뉴스 김환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