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는 북한이 최대 명절로 ‘태양절’이라 불렀던 김일성 주석의 생일 명칭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습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선대의 그늘에서 벗어나 수령 위상을 확고히 하기 위한 차별화에 본격적으로 나섰다는 관측이 나옵니다. 서울에서 김환용 기자가 보도합니다.
Your browser doesn’t support HTML5
한국 통일부 당국자는 16일 “올해 김일성 생일을 맞아 진행된 여러 가지 정황을 보면 생일 공식 명칭이 ‘태양절’에서 ‘4.15’로 바뀐 것으로 잠정 판단한다”고 밝혔습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김일성 주석의 생일인 15일 1면 제호 아래 ‘경축’ 배너에서 예년의 ‘태양절’ 용어를 ‘4.15’로 대체했습니다.
같은 날 지면 전체를 통틀어 ‘태양절’ 표현은 기사 1건에만 썼고, 16일자에는 전혀 쓰지 않았습니다.
북한은 김 주석이 사망하고 3년이 지난 1997년 주요 5개 기관이 공동결정서를 채택하면서 김 주석의 생일을 태양절로 제정했습니다.
북한은 이후 매년 김 주석의 생일을 태양절로 기념했지만 올해 2월 17일을 끝으로 약 두 달간 관영매체에서 태양절 용어가 사라졌고 당일인 15일엔 기사 1건에만 태양절이라는 표현이 등장했습니다.
통일부 당국자는 “북한 공식 매체가 김일성 생일을 ‘4.15’ 또는 ‘4월 명절’ 등으로 부르고 있다”며 “과거 사례와 비교할 때 태양절을 의도적으로 대체하거나 삭제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북한은 태양절 용어뿐 아니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일인 ‘광명성절’도 올해 2월 생일 이후 쓰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김인태 박사는 올 2월부터 4월까지 이른바 선대 지도자의 업적을 기리는 경축 시즌에 북한 당국이 김정은 국무위원장 우상화에 선전 비중을 높이고 있다며, 다소 이례적인 현상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녹취: 김인태 박사] “기본 방향성은 김정은 우상화에 맞추면서 지금 2 4월 간 경축 시즌이 김정은의 대외 업적에 맞춰서 추진되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이와 함께 김정은 위원장이 할아버지와 아버지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는 소식도 아직 없는 상황입니다. 김 위원장은 집권 이후 선대 지도자들의 생일이나 기일에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해왔습니다.
김 위원장의 금수산태양궁전 참배 빈도는 집권 초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통일부 북한정보포털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집권 첫 해인 2012년엔 11번을 참배했지만 지난해에는 3번에 그쳤고 올 들어선 아직 한 번도 참배하지 않았습니다.
고유환 동국대 명예교수는 집권한 지 12년이 된 김 위원장이 자신의 지배체제를 구축한 자신감을 기초로 선대 지도자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시대를 열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녹취: 고유환 명예교수] “처음에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할아버지 이미지를 연결하는 그런 차원에서 할아버지 권위를 활용해서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과정에선 (금수산태양궁전으로의) 잦은 방문 등이 있을 수 있는데 지금은 자기 체제로 완전히 굳었고 어떻게 보면 할아버지나 아버지 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는 거죠."
김 위원장 집권 이후 북한은 선대 지도자에 대한 신격화를 자제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한국 정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 홍민 박사는 금수산태양궁전 참배는 북한 내부 결속 차원에서 중요한 행사이지만 외부 사회엔 봉건왕조시대를 연상시키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며, 이른바 정상국가를 표방하고 있는 김 위원장도 이를 의식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김 위원장이 최근 남북한 ‘2국가론’을 내세워 대남노선을 전환하면서 통일과 민족을 강조했던 선대 유훈과 업적에 거리를 두려는 의도도 깔려있다는 관측이 나옵니다.
홍 박사는 김 위원장의 경우 현실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기존의 원칙과 흐름을 과감하게 전환하는 실용주의적인 통치스타일을 보여왔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홍민 박사] “지도자들을 기리고 지도자들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자신만의 독자성을 부각시키는 측면에서 다소의 거리두기 이런 것을 의도적으로 이미지화시키는 부분도 있다고 봐야겠죠.”
전문가들은 그러나 3대 세습의 당사자인 김 위원장의 정치적 정통성은 선대 지도자들에게서 비롯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만의 차별화를 추구하더라도 한계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통일부 당국자는 “북한이 태양절 용어 사용을 자제한 기간이 두 달에 불과하므로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려면 내년 김정일 생일 이후까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김 주석의 생일을 맞아 북한은 미국이나 한국을 겨냥한 이렇다 할 군사 행보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임을출 교수는 김 위원장이 신형 첨단무기 개발과 지방균형발전 등 안보와 민생을 두루 살피는 리더십을 부각시키면서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 증진에 집중하는 양상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임을출 교수] “대러시아 관계 또는 대중국 관계에 있어서 이전과 다른 친선우호 관계 또 안보협력 관계까지 만들어가는 그런 상황이다 보니까 대남 또는 대미 관계에 신경쓰기 보다는 대내 문제 또는 대중 대러 관계 증진을 통해서 실리를 챙기는 그런 통치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편 김 주석의 생일을 맞아 지난 14일 평양에서 열린 주체사상국제토론회에선 각국 친북단체 인사들이 ‘김정은사상’을 ‘불멸의 사상이론’이라고 찬양했습니다.
‘김정은사상’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북한은 김 위원장 집권 10년을 기점으로 내부에서 김 위원장만의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정립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서울에서 VOA뉴스 김환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