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러시아는 새 조약을 통해 어느 한쪽이 무력침공을 받아 전쟁 상태에 놓이면 지체 없이 군사적 원조를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자동군사개입’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양국 관계가 동맹에 준하는 관계로 격상됐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서울에서 김환용 기자가 보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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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대외관영 ‘조선중앙통신’은 20일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9일 평양에서 서명한 ‘포괄적인 전략적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 전문을 공개했습니다.
총 23개조로 이뤄진 조약 제4조에는 “쌍방 중 어느 일방이 개별적인 국가 또는 여러 국가들로부터 무력침공을 받아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타방은 유엔헌장 제51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러시아연방의 법에 준하여 지체 없이 자기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수단으로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자동군사개입’으로 해석될 수 있는 조항이어서 양국 관계가 사실상 동맹 수준으로 강화됐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이 조항은 1961년 북한과 러시아의 전신 소련이 체결한 ‘조소 우호협조 및 상호원조조약’ 이른바 ‘조소 동맹조약’ 제1조와 거의 동일합니다.
조소 동맹조약 제1조에는 “체약 일방이 어떠한 국가 또는 국가연합으로부터 무력침공을 당함으로써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에 체약 상대방은 지체없이 자기가 보유하고 있는 온갖 수단으로써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고 명시됐었습니다.
다만 이번 북러 간 조약엔 1961년 조약에는 없는 ‘유엔헌장 제51조’와 ‘북한과 러시아 국내법에 준하여’라는 표현이 들어있습니다.
‘유엔헌장 51조’는 유엔 회원국에 무력 공격이 있을 경우 개별적, 집단적 자위권을 가질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 조한범 박사는 북러 간 새 조약 4조는 동맹관계에 버금가는 내용이지만 북러 쌍방의 국내법을 전제조건으로 달았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자동군사개입 조항으로 보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조 박사는 4조는 현재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치르고 있고 북한으로부터 군사 지원을 받고 있는 러시아에 유리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녹취: 조한범 박사] “북한은 이미 군사적 지원을 하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는 이 조항으로 향후 군사적 지원을 무제한 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것이고요. 그러나 한반도 분쟁은 미래의 일이기 때문에 그 때 가서 러시아가 자국법을 근거를 들어 선택할 수 있는 조항을 만들어 놓은 거에요.”
북러는 또 새 조약 3조를 통해 둘 중 한 나라에 “무력침략 행위가 감행될 수 있는 직접적인 위협”이 조성되면 위협 제거를 위한 협조 조치를 합의할 목적으로 협상 통로를 “지체없이” 가동하기로 했습니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장용석 박사는 북러 국내법에 준해야 한다는 내용 외에도 군사 원조 실행 전에 양국 간 합의 절차를 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임을출 교수는 북러 간 이번 조약이 냉전시대 조소 동맹 관계의 복원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임 교수는 북러가 미국 등 서방의 자신들에 대한 안보적 위협 수준이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판단하고 동맹관계 복원을 통해 서방과의 물리적 충돌까지 감안한 군사적 협력체계를 갖추려는 의도라고 분석했습니다.
민간 연구기관인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김열수 안보전략실장은 이번 북러 조약으로 한반도 유사시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근거가 만들어졌다고 평가했습니다.
김 실장은 북러가 유사시 자동군사개입에 가까운 합의를 하면서 이는 방어적일 뿐이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북한은 한국전쟁을 여전히 북침전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며, 북러 조약은 한반도 안보 상황에 새로운 불안 요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장용석 박사는 북한 핵 보유의 불법성을 상징하는 국제사회 제재를 정면으로 거부한 이번 북러 조약을 통해 러시아가 사실상 북한의 핵 보유를 합법적이라고 인정한 셈이라고 말했습니다.
장 박사는 특히 조약 2조에서 등장하는 ‘전략적 안정’이라는 표현은 핵 군축의 핵심 개념이라면서 북한의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녹취: 장용석 박사] “제재에 대해선 수정돼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고 군사 협력은 확대해서 하겠다고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전략적 안정’이라는 표현을 조문에 담음으로써 핵 보유국 간 군비통제의 핵심 개념을 담았다는 점에서 북한 핵 보유를 사실상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한 이런 맥락이 있어서 우려가 많이 됩니다.”
북러 조약엔 국제사회 제재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각종 경제와 과학기술 등 협력 분야가 망라된 것은 물론 제재에 반대하는 국제무대 협력을 시사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예컨대 조약에 협력 분야로 명기된 원자력과 우주 분야는 북한이 핵과 우주기술을 군사적으로 이용해 대량살상무기(WMD)를 개발하고 있기 때문에 제제 위반 소지가 있다는 겁니다.
또 16조는 “쌍방은 치외법권적인 성격을 띠는 조치를 비롯하여 일방적인 강제조치들의 적용을 반대하며 그러한 조치들의 실행을 비법적이고 유엔헌장과 국제법적 규범에 저촉되는 행위로 간주한다”고 규정했습니다.
북러는 특히 이번 조약에서 “패권주의적 기도와 일극 세계질서를 강요하려는 책동으로부터 국제적 정의를 수호”하겠다면서 다극화된 세계 구축을 북러 협력의 명분으로 내세웠습니다.
임을출 교수입니다.
[녹취: 임을출 교수] “북한과 러시아는 제재가 정치적 압박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자주권뿐만 아니라 발전권도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론 북러가 동맹관계를 회복하면서 미국 중심의 일방적인 또는 정치적 판단으로 부여되는 다양한 제재를 거부하겠다, 그런 의도를 보여주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새 조약 체결로 북러 간 경제협력은 대폭 확대될 것이라는 관측입니다.
조약은 무역 확대와 상호 투자 장려를 위해 세관과 재정금융 등 유리한 조건을 마련한다고 돼 있습니다.
또 쌍방은 식량과 에너지 안전, 정보통신 기술 분야에서의 안전, 기후변화, 보건, 공급망 등 전략적 의의를 가지는 분야들에서 증대되고 있는 도전과 위협들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고유환 동국대 명예교수는 북한은 러시아와의 이번 조약을 통해 군사안보는 물론 경제적 측면에서 안전판을 갖게 된 셈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고유환 명예 교수] “자기들이 핵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추가적인 핵우산을 확보했을 수 있고, 안전판을 하나 더 가진 것이고, 거기다가 식량 에너지 등 생존에 필요한 부분에서 러시아 국력으로 보면 북한 정도는 충분히 지원할 수 있고.”
한국 정부는 북러 조약의 구체 내용에 대해 검토 작업을 하고 있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의 20일 브리핑 발언 내용입니다.
[녹취: 임수석 대변인] “우리는 러북 간 포괄적 전략동반자 조약 등 금번 방북 결과 전반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평가에 따라서 동맹과 우방국들을 포함한 국제사회와 함께 우리 안보를 위협하는 어떠한 행위에 대해서도 그에 상응하여 엄중하고 단호히 대응해 나갈 것입니다.”
임 대변인은 또 북러가 “국제사회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포괄적 전략동반자 조약을 체결하고 안보리 결의를 정면 위반하는 군사기술 협력 등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데 대해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습니다.
서울에서 VOA뉴스 김환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