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화해와 경제협력의 상징적인 사업으로 시작된 개성공단이 또 다시 가동을 중단했습니다. 지난 2013년에 이어 두 번째인데요, 그 동안 개성공단의 역사를 이연철 기자가 짚어봤습니다.
개성공단 사업은 2003년 6월, 1단계 착공식과 함께 시작됐습니다. 이듬 해 6월에 15개 한국 기업이 시범단지에 입주했고, 12월에는 첫 제품이 생산됐습니다.
[녹취: 방송 보도] “개성공단에서 만들어진 첫 스테인레스 냄비가 오늘 저녁 우리 밥상에도 올랐습니다. 남한의 자본과 북측의 노동력이 손 잡고 만들어낸 첫 결실입니다”
2005년에 18개였던 입주업체는 2007년에 65개, 2009년 117개 등으로 빠르게 증가했습니다.
북한 근로자도 2004년 55명을 시작으로, 2007년에 2만명, 2009년에 4만명을 넘어섰습니다.
그러나,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개성공단 성장이 급격하게 둔화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한국 정부는 2010년 발생한 북한에 의한 천암함 폭침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5.24 대북제재조치를 발표하면서, 개성공단에 대한 투자확대나 새로운 투자를 전면 금지했습니다.
또, 같은 해 10월에 발생한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 때는 개성공단 출입이 일시 금지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개성공단은 이 같은 남북관계의 긴장 속에서도 가동이 중단되는 사태만은 피했습니다. 남북한 모두 남북한 경제협력의 상징이자 남북관계 최후의 보루로서 개성공단의 특수성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2013년 4월, 미한연합군사 훈련 등을 이유로 개성공단 가동 잠정 중단을 발표하고 북한 근로자 전원을 철수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녹취: 조선중앙TV, 지난 4월 8일] “개성공업지구에서 일하던 우리 종업원들을 전부 철수한다.”
북한은 한국 정부가 문제 해결을 위해 제안한 당국간 실무회담 제의 마저 거부했고, 이에 한국 정부는 국민보호 차원에서 개성공단에 남아있던 한국측 근로자 전원을 철수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개성공단은 첫 삽을 뜬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가동이 전면 중단되는 사태를 맞았습니다.
그러면서 5개월 간 개성공단 가동중단 사태가 이어지면서 남북한 모두 경제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북한의 경우, 북한 근로자들이 개성공단에서 벌어들이는 외화 수입이 끊겼습니다.
이후 남북은 7차례의 회담 끝에 극적으로 합의를 도출했고 개성공단은 가동 중단 5개월여 만에 어렵게 정상을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개성공단은 이처럼 남북관계에 큰 영향을 받으면서
더 이상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2011년 4월에 1백23 개를 기록한 입주기업은 지난 해 11월 기준 1백24개로 단 1개 늘어나는데 그쳤습니다.
또 2009년에 4만 명을 넘어선 북한 근로자 수도 지난 해 11월 말 기준 5만 4천 명으로 증가 속도가 크게 둔화됐습니다.
이런 가운데, 올해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등 북한의 잇단 도발에 대한 대응으로 한국 정부가 개성공단의 가동을 중단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개성공단은 또 다시 중대한 위기를 맞게 됐습니다.
VOA 뉴스 이연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