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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따라잡기] 프랑스 인종 차별 논란과 이민자 문제 


프랑스 경찰이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 10대 청소년 나헬 사망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자들을 연행하고 있다. (자료사진)
프랑스 경찰이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 10대 청소년 나헬 사망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자들을 연행하고 있다. (자료사진)

뉴스의 배경과 관련 용어를 설명해 드리는 ‘뉴스 따라잡기’ 시간입니다. 최근 프랑스 파리 외곽에서 알제리계 10대 청소년이 경찰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 사회의 인종 차별 논란과 이민자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는데요. 뉴스 따라잡기 이 시간에는 프랑스의 오랜 사회적 갈등 현안인 이민자 문제 살펴보겠습니다.

“흔들리는 자유, 평등, 우애 정신”

자유와 평등, 우애는 지금의 프랑스를 있게 숭고한 혁명 정신입니다. 1789년 7월 14일 절대주의 왕정 체제에 항거해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한 프랑스인들의 시민 혁명은 근대 민주주의의 탄생을 알린 신호탄이 됐고, 혁명 정신인 자유, 평등, 우애는 오랜 세월, 프랑스 인들의 의식 저변에 깔린 신념이자 자랑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프랑스 사회의 근간이 돼 온 이 자유와 평등, 우애 정신은 멍들어 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최근 파리 외곽 도시 낭테르에서 10대 소년이 경찰관의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은 프랑스 사회에 오랫동안 누적돼온 갈등의 한 단면을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지난달 ‘나엘’이라는 17살 청소년이 경찰의 교통 검문을 피해 달아나다가 근거리에서 경찰이 쏜 총을 맞고 숨졌다는 소식에 프랑스 시민들은 분노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수도 파리를 비롯해 제2의 도시 마르세유, 리옹, 툴루즈 등 프랑스 도시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는 일주일 가까이 이어졌고, 경찰과 시위대 간 충돌로 부상자가 속출했습니다.

시위는 10대 소년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애도하는 수준을 넘어 일부 지역에서는 방화와 약탈 등 소요 사태로 비화했는데요. 이는 그동안 곪아 있던 인종 갈등과 사회∙경제적 불평등, 불공정한 법집행 등에 대한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습니다.

“똘레랑스의 위기”

프랑스인들을 대표하는 또 하나 중요한 덕목과 가치는 프랑스어로 ‘똘레랑스’라고 하는 ‘관용’ 정신입니다.

똘레랑스는 넓은 의미에서 나와 다른 사람의 다름을 존중하고 인정한다는 고상한 정신입니다. 여기에는 다른 문화, 다른 인종을 인정하고 차별과 편견에 반대하는 개념도 포함됩니다.

하지만 프랑스 사회 일각에서는 이러한 똘레랑스가 선택적 관용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다른 주변 유럽 나라들보다 이민 역사도 길고, 이민자들에게 개방적이고 우호적인 나라로 알려져 왔습니다.

앞서 소개한 프랑스의 관용 정신도 이유의 하나지만, 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의 급속한 경제 성장 시기, 부족한 노동력 충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민자들을 적극 수용했는데요.

그에 따라 과거 프랑스가 식민 지배했던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 등지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됐습니다.

하지만 이민자들이 급증하면서, 관용의 정신을 토대로 보편적 가치를 중시해온 프랑스와 그들의 고유 문화와 풍습을 지키려는 이민자 사회가 충돌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는 인종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인정하지 않는 모양새입니다.

지난해 연임에 성공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이민 정책 기조는 프랑스의 정체성 강화입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는 언제나 이민자들의 나라였고 우호적이지만, 프랑스가 모든 사람을 다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입장입니다.

프랑스 정부는 올해 초에는 불법 이민 단속은 엄격히 강화하되, 합법적인 이민은 장려하고 부족한 노동력 문제 해결을 위해 불법 이민자들에게 한시적 체류를 허용하는 내용의 이민법 개정안을 의회에 제출했는데요. 하지만 어느 쪽의 지지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당초 마크롱 대통령은 7월 첫 주 정도면 법안이 통과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최근 소요 사태로 법안의 미래는 더 불투명해졌습니다.

“프랑스 이민자 현황”

프랑스에서 이민자 문제가 왜 이렇게 심각한 사회적 갈등이 되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인구 분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프랑스 전체 인구는 7월 10일 기준, 약 6천500만 명인데요. 이들 가운데 약 10. 5%, 690만 명이 프랑스가 아닌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바꿔 말해 10명 중 적어도 1명은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이라는 소리입니다.

특히 이 가운데500만 명은 유럽 지역이 아닌 대부분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로 언어, 문화, 역사적 배경이 많이 다른데요. 알제리, 튀니지 등 과거 프랑스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주로 이슬람권 국가이다 보니 프랑스의 전통적 기독교 문화와는 큰 간극이 있습니다.

“깊어지는 갈등, 사회 문제 증가”

경제적 불평등은 이민 사회의 불만을 더욱 부채질했습니다. 프랑스 사회에 동화하지 못한 이들은 대개 도심 외곽 지역에 살면서 빈곤층을 이루게 됐는데요. 그러면서 범죄와 실업률 증가 등 각종 사회 문제가 야기됐습니다.

프랑스에서 나고 자라 프랑스에서 교육받고 프랑스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이민 2세대, 3세대는 사회적 편견과 인종. 종교적 차별에 반발했습니다.

이들은 프랑스 사회의 일원이 됐지만 여전히 인종적, 종교적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이 만연해 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회 곳곳에서 소수에 대한 무시, 무례한 행동, 채용 거부, 승진 누락 등의 차별이 자행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인권 운동가들은 특히 프랑스 경찰의 공권력 남용과 폭력적 대응은 흑인이나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들이 자주 겪는 일반적 형태의 차별이라고 지적하는데요. 이번 나엘 군 사망 사건 전에도 소수에 대한 경찰의 폭력적 대응은 종종 논란거리가 됐습니다.

한 독립적 인권 단체의 2017년 자료에 따르면 아랍계, 흑인들이 경찰의 불심 검문을 받는 비율은 다른 인종에 비해 20배나 높았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는 경찰이 관행적으로 인종 차별을 한다는 주장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프랑스는 예전부터 인종 차별을 하지 않는 나라, 모든 시민은 일단 프랑스인이라는 가치를 지키고 있다는 입장인데요.

하지만 이러한 인식과 접근법은 도리어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개선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사태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최근 10년 새 프랑스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테러 사건은 프랑스 사회에 반난민, 반이슬람 정서를 더 부채질하고 있는데요. 그러면서 마린 르펜 같은 극우 정치인도 득세했습니다. 지난 6월에도 시리아 출신 난민 신청자가 프랑스 남동부의 한 공원에서 칼부림 난동을 벌여 아기와 어린이 등 여러 명이 다치는 사건이 벌어져 프랑스를 큰 충격에 빠지게 했습니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뉴스의 화제 인물을 소개하는 ‘뉴스 속 인물’ 시간입니다. 오늘 주인공은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입니다.

지난 7월 18일은 ‘국제 넬슨 만델라의 날’이었습니다.

유엔은 지난 2009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민주화와 인종 차별 투쟁으로 점철된 그의 생애를 기려, 그의 생일인 7월 18일을 ‘국제 넬슨 만델라의 날’로 제정했는데요. 매년 이날이 되면 여러 나라에서 67분 동안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는 기념 행사 등을 통해 만델라 전 대통령의 생애를 기립니다.

67분은 그가 인종차별에 맞서고 평등을 쟁취하기 위해 싸웠던 67년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은 1918년 7월 18일 태어나 지난 2013년 12월 5일, 95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남아공 남부 시골 마을 ‘음베조’에서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이름은 롤리랄라입니다. 넬슨이라는 이름은 그가 초등학교 때, 모든 학생은 기독교 이름을 갖게 하는 학교 관행에 따라 그의 선생님이 지어준 이름입니다.

성장하면서 그는 남아프리카 흑인들의 비참한 현실을 깨닫게 됐고요. 대학 시절, 학생 시위에 참가하며 흑인 인권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1944년에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라는 청년 동맹을 조직하고, 1952년에는 남아공 최초의 흑인 변호사 사무실을 열어 흑인들의 희망이 됐습니다.

1960년 요하네스버그 샤프빌이라는 곳에서 남아공의 악명 높은 흑백 분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가 발생하는데요. 당시 국민당 정부 경찰은 비무장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약 70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그는 비폭력 노선을 포기하고 무장투쟁으로 돌아섰습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1962년 경찰에 체포됐고요. 이후 종신형을 선고받고 로벤 섬 교도소 등에서 복역하다 약 27년 만인 1990년 석방됐습니다.

국제 사회의 압박과 남아공 흑인들의 굽히지 않는 투쟁의 결과였습니다.

40대 초반에 교도소에 들어가 일흔 노인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온 그는 보복과 투쟁 대신 용서와 화해를 설파했습니다.

백인 정부에 맞서 무력 투쟁을 요구하는 강경파를 설득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남아공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길 원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이 인정받아 1993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1994년 4월, 남아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이 참여하는 총선거가 실시되는데요. 이 선거에서 만델라는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돼 1999년까지 재임했습니다.

그는 과거 청산과 사회 통합을 위해 ‘진실화해위원회’를 만들었는데요. 진실을 고백하는 가해자에게는 처벌 대신 사면을 골자로 한 이 진실화해위원회는 용서와 화해의 모델이 됐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뉴스 따라잡기, 이 시간에는 프랑스 사회의 이민자 갈등 상황 짚어봤고요. 뉴스 속 인물로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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