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대북제재 위반 혐의로 억류한 선박의 수상한 과거 항적이 포착됐습니다. 위치 신호를 끈 채 지난 1년 간 단 2곳의 항구에 입항했는데, 북한에 들렀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함지하 기자가 보도합니다.
대북제재 위반 연루 의혹으로 한국 정부에 억류된 선박 ‘더 이(De Yi)’ 호는 올해 1월에야 처음으로 위치 신호를 발신했습니다.
VOA가 선박의 위치정보를 보여주는 마린트래픽(MarineTraffic)에서 더 이호의 지난 1년 치 운항 기록을 살펴본 결과 2023년에 전혀 운항하지 않다가 올해 1월 7일 중국 웨이하이 항 인근 바다에 나타났습니다.
일반적으로 선박은 자동식별장치(AIS)를 통해 위치를 알리는 만큼, 이때부터 이 장치를 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웨이하이 항 부두에 접안한 ‘더 이’호는 그로부터 약 2주 뒤인 1월 25일 뱃머리를 한반도로 돌리더니 나흘 뒤인 28일 새벽 1시경 부산항에 입항합니다.
당시 한국 정부에 상세히 남긴 선박 정보에 따르면 2천999t 규모의 산적 화물선(벌크선)인 ‘더 이’호에는 비한국인 선원 13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더 이’호는 부산항 입항 약 17시간 만인 28일 오후 6시 5분 다시 출항했는데, 이때 한국 항만 당국에 신고한 다음 목적지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입니다.
그러나 더 이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지 않았습니다.
마린트래픽에 따르면 이 선박은 마치 블라디보스토크로 항해하려는 듯 부산에서 울산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가 약 4시간 만인 29일 오후 10시경 다시 기수를 부산 방면으로 돌리는 특이한 항적을 남겼습니다.
그렇게 대한해협까지 남하하더니 다음 날인 1월 30일 오전 6시 23분경 위치 신호 발신을 중단하며 지도에서 사라집니다.
‘더 이’호가 다시 지도에 등장한 건 58일 만인 3월 28일입니다.
당시 한국과 중국의 중간 수역에 재등장한 이 선박은 한국 남해를 따라 이동하다가 돌연 기수를 부산항 쪽으로 돌렸습니다. 한국 정부에 의해 나포돼 한국 영해로 진입하는 과정으로 추정됩니다.
그동안의 항적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위치 신호를 끄고 사라졌던 58일 동안 어디에서 어떤 일을 벌였느냐는 것입니다.
각국 항구를 운항하는 화물선이 위치 신호를 끄고 두 달이나 잠적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특히 국제해사기구(IMO)는 국제 수역을 운항하는 선박들이 AIS를 상시 켜두고 운항하도록 의무화했습니다.
현재로선 ‘더 이’호가 AIS를 끈 채 북한을 방문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해군 대령 출신으로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패널에서 활동한 닐 와츠 전 위원은 3일 VOA와의 전화통화에서 “불법 활동을 하는 선박은 북한 해안에서 50~70마일 이내로 접근하면서 선박자동식별장치(AIS)를 꺼버리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기록만으로는 선박이 제재 회피를 위해 북한 관할의 제한 수역에 들어가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녹취: 와츠 전 위원] “What normally happens is that vessels engaged in illegal activity usually switch off the AIS when they get to within 50 to 70 miles of the North Korean coast. So, when you look at the records, it may look like the vessel has not entered into restricted waters, which is the jurisdiction of North Korea to carry out sanctions circumvention.”
제3국 선박이 북한 수역에 진입하면서 AIS를 끈 사례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포착됐습니다.
앞서 VOA는 북러 무기 거래 현장으로 지목된 북한 라진항에서 위성사진을 통해 대형 선박의 입출항 장면을 확인했지만, 이들 선박은 AIS 자료에 근거한 마린트래픽 지도엔 단 한 척도 표시되지 않습니다. 북러 무기 거래에 동원된 것으로 의심되는 러시아 선박이 AIS를 끄고 라진항을 드나들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나타샤 브라운 IMO 언론정보 서비스 담당관은 지난해 10월 러시아 선박이 AIS를 끄고 운항한다는 VOA의 지적에 “선박이 항해 중이거나 정박 중일 때 AIS를 항상 작동시켜야 한다는 지침은 매우 명확하다”고 확인했습니다.
[브라운 담당관] “The guidelines are very clear - AIS should always be in operation when ships are underway or at anchor. If the master believes that the continual operation of AIS might compromise the safety or security of his/her ship or where security incidents are imminent, the AIS may be switched off.
다만 “선장이 AIS의 지속적인 작동이 선박의 안전 혹은 보안을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하거나 보안 사고가 임박했다고 판단하는 경우 AIS를 끌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더 이’호가 지난 1년간 정박한 항구가 웨이하이 항과 부산항 2곳뿐이라는 공식 기록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IMO의 국제통합해운정보시스템(GISIS) 자료에 따르면 ‘더 이’호는 지난해 5월 토고 선적을 취득하며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습니다. 이전까진 중국 선적의 장신 11호였지만 이때부터 새로운 이름과 선적으로 운항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후의 운항 기록은 웨이하이 항에서 부산항으로 이동한 올해 1월과 최근 한국 정부에 억류될 때가 전부로, 그 외 항적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고가의 화물선을 구매한 선주가 선박을 묵혀 두긴 어려운 만큼 주로 AIS를 끈 채 운항했고, 그만큼 불법 행위에 연루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됩니다.
선박의 등록 소유주는 중국 홍콩 소재 ‘HK 일린 쉬핑’으로, 더 이호 한 척만 소유한 초소형 회사입니다.
와츠 전 위원은 “선박을 억류하는 것은 심각한 사안”이라며 미국과 한국 정부가 이 선박의 제재 위반 행위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확보했을 것으로 추측했습니다.
특히 한국이 공해상에서 선박을 억류한 점에 주목하며 “한국은 유엔 제재 이행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녹취: 와츠 전 위원] “By doing so, South Korea is also signaling that they are serious about implementing UN sanctions. I think this is particularly significant in the view that or in the light that Russia has pulled the plug on the panel of experts for North Korea. So, in terms of timing, it would send a signal that sanctions are still very much still in force, even though the panel which reports on sanctions and reveals who the perpetrators are of sanctioned circumvention that this is happening.”
이어 “러시아가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패널의 활동을 중단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시점상 제재 위반 행위를 보고하고 제재 회피의 가해자를 밝혀내는 전문가패널이 처한 상황 속에서도 제재가 여전히 작동한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실제로 한국 정부의 이번 조치는 전임 정부의 접근법과 비교해 적극적인 제재 집행 사례로 평가될 것으로 보입니다.
앞선 문재인 정부 당시 한국은 여러 차례 제재 위반 논란에 휩싸인 바 있습니다.
2017년에는 러시아에서 선적된 북한 석탄이 한국 인천과 포항으로 운송됐으며, 2018년엔 메르세데스 벤츠 차량 2대가 부산에서 선적돼 이후 북한에서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또 2019년엔 공해상에서 북한 선박들에 유류 제품을 건네는 ‘선박 간 환적’에 한국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유조선들이 대거 가담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당시 미국 정부는 대북 해상거래 주의보를 통해 북한 선박과 환적한 것으로 의심되는 유조선 18척의 정보를 공개했는데 이 중 7척이 줄곧 한국 부산과 울산 등을 드나들며 불법 환적의 중심지로 통하는 동중국해 공해상에 여러 차례 머문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 밖에 미국 정부는 석탄을 불법 운반하다 인도네시아 정부에 붙들린 북한 선박 ‘와이즈 어네스트’ 호를 억류한 뒤 매각 처리했는데, 이 선박에 실려 있던 석탄의 최종 목적지가 한국이라는 사실이 이후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한편, 3일 한국 정부는 한미 간 긴밀한 공조를 바탕으로 ‘더 이’호의 안보리 결의 위반 혐의를 조사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한국 언론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지난달 30일 전남 여수항 인근 해상에서 대북제재 위반 혐의로 더 이호를 나포했습니다. 현재 ‘더 이’호는 부산 암남공원 앞바다 묘박지에 정박해 있습니다.
VOA 뉴스 함지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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