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통령실은 북한 비핵화 협상에서 ‘중간 단계’(interim steps)’는 없다는 미국측 입장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한국 내 일각에서 제기되는 북한 핵 동결과 미북 군축협상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차단하기 위한 발언으로 보입니다. 서울에서 김환용기자가 보도합니다.
장호진 한국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은 27일 한국의 공영방송 ‘KBS 1TV’의 시사프로그램에 출연해 미국이 핵동결과 제재 완화를 맞바꾸려는 협상안을 검토 중인 게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는 지적에 그러한 우려는 ‘사실무근’임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장 실장은 “미국의 상당한 고위층을 포함해 ‘중간 단계’란 것은 없다고 여러 번 확인했다”며 “그 문제에 대해선 크게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에서 나온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에서의 이른바 ‘중간 단계’ 언급을 두고 비핵화를 장기적 과제로 설정하고 단계적 조치로 ‘핵 동결’에 치중하려는 게 아니냐는 한국 내 우려에 선을 그은 겁니다.
미라 랩-후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동아시아 오세아니아 담당 선임보좌관은 지난달 초 한국에서 열린 한 포럼에서 바이든 행정부의 당국자로선 처음 ‘중간 단계’를 언급했습니다.
그는 ‘북한이 핵 보유국인 만큼 비핵화 대신 위협 감소, 군축 등을 시도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있다’는 질문에 “미국의 목표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면서도 “그러나 만약 전 세계 지역을 더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면 비핵화를 향한 중간 단계도 고려할 용의가 있다”고 답했습니다.
이후 정 박 미 국무부 대북 고위관리도 한 세미나에서 “궁극적인 비핵화로 향하는 과정에 중간 단계 조치가 있어야 한다는 건 당연하다”고 언급해 한국 내에선 바이든 행정부의 북한 비핵화 접근법의 변화 가능성이 제기됐습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에 조건없는 대화를 줄기차게 제안했던 미 행정부 측에서 갑자기 ‘중간 단계’ 발언이 나오면서 한국 내 일각에선 북 핵 동결은 물론 군축으로 미국의 대북 협상 방식이 바뀌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박원곤 교수] “한국 입장에서 오해라는 게 두가지겠죠. 하나는 바이든 정부의 비핵화 정책이 변했느냐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정말 그 변하는 방향이 핵 군축으로 가는 게 아니냐 그렇게 될 경우 한국 내에선 다시금 핵무장론이 강화될 수 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한 한국 정부의 책임있는 관료의 정리가 필요했다고 판단됩니다.”
한국 정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 조한범 선임연구위원은 미국 조야에서 북한 비핵화 원칙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비핵화를 달성하는데 장기전이 불가피하다는 현실론이 부각되면서 ‘중간 단계’에 대한 미한 간 입장과 해석의 차이가 생길 여지가 만들어졌다고 진단했습니다.
조 선임연구위원은 북핵 협상을 장기전으로 전제할 경우 한국으로선 핵 위협 노출이 장기화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한국 내 이른바 자강파들의 자체 핵 무장론을 자극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미국이 북한을 협상으로 끌어내기 위한 방편으로 ‘중간 단계’를 제시하면서도 한국에게는 비핵화 원칙이 흔들린다는 오해를 불식시키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게 조 선임연구위원의 설명입니다.
한국 외교부 산하 국립외교원 김현욱 교수는 핵 보유국을 기정사실화하면서 한국을 교전 중인 적대국으로 규정한 현 시점에서 한국 정부는 북한과의 핵 협상 자체에 대한 신뢰가 크게 줄어든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김현욱교수] “한국 입장에선 협상의 절차적 측면이나 구체적인 협상 스텝 측면보다 북한은 이미 핵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중간 단계로 들어가서 협상을 한다는 것 자체에 상당히 의구심을 갖고 있는 거죠.”
일각에선 바이든 행정부의 ‘중간 단계’ 언급은 교착 국면 탈피를 위한 새로운 시도를 해 본 것이라는 분석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바이든 행정부는 ‘잘 조정된 실용적 접근’과 단계적 접근을 통해 외교적 공간을 모색하는 걸 골자로 하는 대북정책을 추진하면서 북한에 일관되게 ‘조건 없는 대화’를 촉구했지만 북한은 응하지 않았습니다.
통일연구원 박형중 석좌연구위원은 미 행정부 관리들이 대통령 선거를 1년도 채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정책의 중요한 변화를 시사하는 ‘중간 단계’를 언급한 것은 성사 가능성을 크게 염두에 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박 석좌연구위원은 미 행정부 내에서 북핵 문제를 다루는 방안을 놓고 고민하고 있는 양상이지만 결국 정책 변화는 11월 미 대선 이후 한국과의 긴밀한 조율 과정을 거쳐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박형중 석좌연구위원] “중요한 것은 다음 대통령 취임 이후 어차피 정책 재조정을 검토할 거니까 그 때 가서 결정될 것이고 그 때 가서 한미 간에 심각하게 논의할 사안인 것이고 지금은 그 문제를 꺼낼 시기가 아닌 것이고 그런 차원에서 한국 정부가 확인하면 미국 정부는 기존 입장 고수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겠죠.”
김현욱 교수도 북한이 미 행정부 관리들의 ‘중간 단계’ 발언에 대해 진정성 있는 협상 제안이라기 보다는 대선을 앞두고 자신들을 관리하기 위한 유화 제스처로 이해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습니다.
장호진 실장은 방송에서 또 한러 관계에 대해 “궁극적으로 남북한 중 어디와 협력해야 하는지 러시아 스스로가 잘 안다”며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제 정세 블록화가 가속하거나 새로운 외생 변수가 심각하게 생기지 않으면, 한러 관계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장 실장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연내 방북 시 북러 사이에 핵심적인 거래가 진행될 가능성에 대해선 “북러 군사협력과 관련해 한국이 특히 우려하는 부분이 있고 러시아도 이를 알고 있으며 서로 소통이 있었다”며 “러시아도 한국 측이 안 해줬으면 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그것도 우리가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려의 균형을 통해 양측이 서로 레버리지가 있는 형국이고 이런 균형점을 러시아 측이 잘 지키기를 바란다”고 강조했습니다.
조한범 선임연구위원은 한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살상무기 지원 카드를, 러시아는 대북 전략 무기 관련 지원 카드를 갖고 있다며 장 실장 발언으로 미뤄 한러 간 선을 넘지 말자는 암묵적 동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조한범 선임연구위원] “러시아가 북한과의 탄약 거래에서 상당한 정도로 북한에게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있지만 그러나 러시아는 그게 한반도 안보에 위협을 줄 정도가 아니라는 암묵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고요, 한국 정부도 결국 러시아가 선을 넘지 않는다면 러시아가 우려하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지원 가능성을 조절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거든요.”
장 실장은 또 북중 관계에 대해선 “올해가 북중 수교 75주년인데 분명히 접근은 어느 정도 하는 것 같은데 아귀가 잘 맞는 느낌은 아닌 부분도 있다”며 “우리도 그 부분에 좀 관심을 갖고 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장 실장은 북한과 러시아, 북한과 중국 관계가 진전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등에서 서로 이해관계가 다른 부분이 있다며 “현재 상황은 북러 관계와 북중 관계의 교집합이 나타나는 것이지, 러북중 연대로 완전히 정형화된 상태는 아니”라고 분석했습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북한과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데 대해선 “북일 대화가 북핵 문제나 한반도 정세에 건설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테니 당연히 지지한다”고 밝혔습니다.
서울에서 VOA뉴스 김환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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