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매체들, 중국 매체 인용 가장해 일본인 유골 문제 제기

지난달 28일 이하라 준이치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오른쪽)을 대표로 한 일본 정부 당국자들이 평양을 방문해 북한의 서대하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왼쪽) 등 북한 측 관계자들과 일본인 납치문제를 논의했다. (자료사진)

북한의 주요 관영매체들이 북한 내 일본인 유골 문제가 일본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로 방치되고 있다고 비판한 중국 매체의 글을 일제히 소개했습니다. 북-일 간 납북자 문제 협상에 걸림돌로 등장한 ‘메구미 타살설’에 대한 여론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의도라는 관측입니다. 서울에서 김환용 기자가 보도합니다.

북한 관영매체인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10일 중국 인터넷 홈페이지 ‘1코리안뉴스’에 ‘묘비 없는 무덤, 일본인 유골 문제를 살펴보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며 그 내용을 자세하게 소개했습니다.

이 글은 일본인 유골 문제가 일제의 침략전쟁 과정에서 빚어진 문제로 일본 정부가 북한에 일본인 사망자 유골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에 대한 책임을 외면해 왔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북한은 일제의 야만적 식민지통치에 대한 증오에도 불구하고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일본인 묘지를 지켰다고 강조했습니다.

북한의 대외용 라디오방송인 `평양방송'도 지난 11일, 그리고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3일 같은 글을 보도했습니다.

이처럼 북한 주요 매체들이 일제히 소개한 글은 하지만 북한 사회과학원의 조희승 역사연구소장이 쓴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 때문에 북한 매체들이 필자를 소개하지 않고 인용보도한 데 대해 북한의 주장을 외부의 시각으로 포장해 여론을 호도하려는 의도라는 비판이 제기됐습니다.

한국 정부 관계자는 북한 매체들이 중국 인터넷 매체로 소개한 ‘1 코리안뉴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 매체지만 친북매체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이 이처럼 우회적인 방법으로 일본인 유골 문제를 제기하고 나온 이유에 대해선 북-일 간 납북자 문제 협의가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불거진 메구미 타살설 때문이라는 관측이 제기됐습니다.

한국의 한 민간단체는 일본인 납북자인 요코타 메구미 씨가 북한의 한 정신병원에서 치사량에 가까운 수면제와 진정제를 투여 받고 지난 1994년 사망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최근 공개했습니다.

남광규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교수는 비록 일본 정부가 이 증언이 사실무근이라고 밝혔지만 일본 납북자의 상징인 ‘메구미 타살설’이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는 북한 측의 의도가 깔려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녹취: 남광규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교수] “북한에 메구미가 약물중독 등으로 타살 당했다는 증언들이 나왔잖아요. 이렇게 되면 북-일 간 납북자 문제 협상에 큰 암초가 걸린 거죠. 그런데 북한이 중국 매체를 통해 우회적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유골 문제에 일본이 소극적으로 나온다고 하는 얘기는 메구미 사건을 희석시키려는 게 아닌가…”

북한이 유골 반환보다 해결하기 까다로운 납치 문제를 먼저 해결하려는 일본 측 입장에 대해 불만을 드러낸 것이라는 관측도 있습니다.

일본은 지난달 말 평양에서 북한에 납치 피해자에 대한 조사가 가장 중요하다는 뜻을 전하며 사실상 유골 문제 협의를 뒤로 미뤘습니다.

한국 정부 관계자는 북한이 유골 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듯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일본 내 유골 문제 해결을 원하는 여론을 만들어 일본 정부를 압박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이를 통해 북-일 협상의 주도권을 쥐고 더 큰 제재 해제를 이끌어내거나 경제적 보상을 받으려는 계산일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일본 정부는 태평양전쟁 당시 북한 지역에 주둔했던 일본 군과 종전 후 귀국하지 않은 일본인 유골 2만천여 구가 북한에 있는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서울에서 VOA뉴스 김환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