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한국을 ‘제1의 적대국’으로 명기하고 ‘평화통일’ 표현도 삭제하는 헌법 개정 의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윤석열 한국 대통령은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한 북한 정권에 대해 반민족적이고 반역사적 집단이라고 비판했습니다.서울에서 김환용 기자가 보도합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15일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0차 회의 시정연설에서 “대한민국을 철두철미 제1의 적대국으로, 불변의 주적으로 확고히 간주하도록 교육교양사업을 강화한다”는 내용을 헌법 조문에 명기하는 게 옳다고 말했다고 북한 대외관영 ‘조선중앙통신’과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16일 보도했습니다.
북한 매체들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우리 국가의 남쪽 국경선이 명백히 그어진 이상 불법무법의 ‘북방한계선’을 비롯한 그 어떤 경계선도 허용될 수 없으며 대한민국이 우리의 영토, 영공, 영해를 0.001㎜라도 침범한다면 그것은 곧 전쟁 도발로 간주될 것”이라며, 이와 관련해서 “헌법의 일부 내용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이어 “우리 공화국이 대한민국을 화해와 통일의 상대이며 동족이라는 현실모순적인 기성개념을 지워버리고 철저한 타국으로 가장 적대적인 국가로 규제한 이상 공화국의 주권 행사 영역을 합법적으로 정확히 규정짓기 위한 법률적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헌법에 있는 ‘북반부’,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이라는 표현들이 이제는 삭제되어야 한다고 본다”며 “이러한 문제들을 반영하여 공화국 헌법이 개정돼야 하며 다음 번 최고인민회의에서 심의돼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김 위원장은 또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대한민국을 완전히 점령, 평정, 수복하고 공화국 영역에 편입시키는 문제를 반영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명백히 하건대 우리는 적들이 건드리지 않는 이상 결코 일방적으로 전쟁을 결행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핵 무력의 전쟁 억제라는 본령 이외에 제2의 사명”을 언급해 핵 무력을 전쟁을 막는 데만 사용하진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김 위원장은 이와 함께 남북 교류협력의 상징인 경의선 북한 측 구간의 완전한 단절 등 접경지역의 남북 연계 조건들을 분리시키는 단계적 조치를 실시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또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 철거 등 민족역사에서 통일과 화해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제거하라고 주문했습니다.
북한은 최고인민회의에서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민족경제협력국, 금강산 국제관광국도 폐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북한의 이런 일련의 결정들은 지난해 연말 김 위원장이 당 전원회의에서 남북관계를 ‘교전 중인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하면서 대남정책 전환 방침을 밝힌 데 따른 후속 조치로 풀이됩니다.
윤석열 한국 대통령은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김 위원장이 남북관계를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한 데 대해 비판했습니다.
[녹취: 윤석열 대통령] “북한 정권 스스로가 반민족적이고 반역사적 집단이라는 사실을 자인한 것입니다.”
윤 대통령은 북한이 연초부터 잇달아 서해 북방한계선(NLL) 부근 포 사격과 탄도미사일 발사 등 도발을 하고 있는 데 대해 한국 내 여론 균열을 노린 행동으로 규정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지금 대한민국 정부는 과거 어느 정부와도 다르다”며 “북한이 도발해 온다면 우리는 이를 몇 배로 응징할 것이고 ‘전쟁이냐 평화냐’ 협박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한국 국방부는 NLL을 불법이라고 주장한 김정은 위원장의 발언에 맞서 NLL 수호 의지를 밝혔습니다.
[녹취: 전하규 대변인] “NLL은 우리 장병들이 수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사수해 온 실질적인 해상경계선이고 어떠한 경우에도 이 NLL을 지키고 수호하겠다는 것은 우리 군의 확고한 입장입니다.”
김 위원장의 발언과 대남기구 정리와 같은 조치들은 분단 후 70여년 간 유지됐던 동일 민족, 통일 대상이라는 북한의 대남정책 기조의 본질적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특히 이번 최고인민회의에서 헌법상 한국을 불변의 주적으로 명시키로 결정한 것은 항구적 조치라는 점을 부각하며 대남 압박의 수위를 높이려는 의도라는 관측입니다.
한국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김인태 수석연구위원은 북한은 헌법보다 상위에 있는 당 규약도 같은 방향으로 개정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녹취: 김인태 수석연구위원] “통일전략을 외형상으로 지금까지 유지하지 않았습니까. 그 부분을 완전히 깨고 가겠다는 거거든요. 일단 헌법까지 고친다면 두 번째 단계가 내년 예정돼 있는 9차 당 대회에서 당 규약에까지 박아 넣겠죠.”
한국 통일부 당국자는 북한의 대남 강경행보에 대해 “북한은 2019년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 결렬 이후 대남기조를 바꾸고 있다”며 “체제에 대한 불안감, 대남 자신감 결여, 흡수통일에 대한 두려움”때문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 당국자는 “경제 제재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내부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대남 적개심을 고취해야 하는 내부 수요가 있다”며 “대남노선의 변경 책임을 한국 정부에 전가해 사회 분열을 조장하는 심리전 의도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의 이번 결정이 공세적이기보다 오히려 체제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적 조치라는 분석도 나옵니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 스스로 한국과의 체제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체제 보호 차원에서 한국과의 관계 단절을 선택한 것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고 명예교수는 반동사상문화배격법, 평양문화어보호법 등 한국 문화 유입을 극도로 경계한 북한의 법 제정도 그런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녹취: 고유환 명예교수] “핵 무력은 완성을 선언하고 고도화를 지금 하고 있는 단계니까 충분히 핵을 갖고 자력갱생하면서 러시아, 중국과의 관계 속에 어느 정도는 살아갈 수 있다고 판단하고 그것이 자기체제 유지에 유리할 것이라고 본 거죠.”
한국 정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 조한범 선임연구위원은 김 위원장의 대남정책 전환이 정권의 정당성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조 선임연구위원은 선대 지도자들의 유훈인 조국통일 과업은 백두혈통 정권의 정당성을 지지하고 주민들에게 희생을 요구할 수 있는 노동당의 존립 목적이었다며 김 위원장의 이번 조치가 자신의 지도력에 상처를 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조한범 선임연구위원] “한반도 통일을 위해선 모든 걸 희생할 수 있다는 논리를 단번에 뒤집고 김정은 독재체제만 유지하겠다는 본심을 드러낸 거거든요. 따라서 북한 주민들이 내면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거다, 통일을 염원하는 한반도의 모든 통일세력들의 공격 대상이 될 거고, 내부적으로 북한 주민과 엘리트들이 드러내놓고 반발은 못하겠지만 근본적으로 회의를 품기 시작할 거다, 그러니까 김정은의 정당성은 구조적으로 취약해지는 거죠.”
통일연구원 홍민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이 한국과의 민족관계를 페기하고 교전국으로 규정하는 헌법 개정에 나선 것은 핵 무력 정책 헌법화 조치와 함께 차기 미국 행정부에 보내는 메시지가 내포돼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홍 선임연구위원은 핵 무력 정책 헌법화는 북한의 핵 보유는 되돌이키기 어렵다는 점을, 그리고 남북한 간 민족관계 폐기와 교전국화는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는 미국과 북한이라는 점을 미국 측에 각인시키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서울에서 VOA뉴스 김환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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