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무부가 뉴욕 유엔주재 북한대표부에 미국인의 법원 문건을 전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미국이 ‘외교적 경로’를 이용해 북한과 접촉한 사실이 공식 확인된 것입니다. 함지하 기자가 보도합니다.
미국 국무부가 북한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미국인들의 대북 소장과 판결문 등을 북한 측에 공식 전달했습니다.
미국 연방법원 전자기록 시스템에 따르면 워싱턴 DC 연방법원 서기관실은 최근 국무부 법률자문실(the Office of the Legal Adviser)로부터 수신한 서한 3건을 각 재판부에 공개하는 방식으로 이 같은 내용을 알렸습니다.
각 서한에는 대북 소송 관련 문건이 국무부에 의해 뉴욕 유엔주재 북한대표부에 전달됐다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국무부는 중국에서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납치됐다 이듬해 평양에서 숨진 것으로 알려진 김동식 목사의 가족들이 제기한 소송과 일본 적군파 요원의 테러 사건으로 사망한 카르멘 크레스포-마티네즈 등의 상속인 등의 대북 소송에 대한 소장을 북한 측에 전달했습니다.
또 2021년 북한의 23억 달러 배상 책임을 명시한 미 해군함정 푸에블로호 승조원과 가족 등의 최종 판결문과 의견서 등도 유엔주재 북한대표부에 전해졌습니다.
법원 서기관실이 공개한 서한에 따르면 국무부는 지난해 11월 27일 외교 문서의 일종인 ‘공한(diplomatic note)’을 작성했으며, 올해 2월 12일 각 법원 문건을 첨부한 이 공한을 뉴욕주재 유엔대표부에 송부했습니다.
현재로선 북한이 국무부의 ‘공한’에 어떤 답변을 했는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VOA는 국무부와 유엔주재 북한대표부에 관련 내용을 문의한 상태로 답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앞서 국무부는 지난해 6월 ‘외교적 경로’를 이용해 북한에 법원 문건을 전달해 달라는 김동식 목사의 유족과 일본 적군파 희생자 유족 등의 요청을 거절한 바 있습니다.
국무부는 이들의 변호인에게 보낸 서한에서 “북한은 사법 문건 송달에 관한 헤이그 협약의 당사국이 아니며, 여기에 더해 미국은 북한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지 않고 미국 대표단을 북한에 두고 있지도 않다”는 이유를 들어 외교적 경로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었습니다.
국무부 법무자문실은 당시 결정에 대한 VOA의 이메일 질의에 “일반적으로 우리는 진행 중인 소송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면서도 “국무부는 외국주권면제법 조항에 따라 북한에 (법원 문건을) 송달할 수 있는 선택지를 계속 모색하고 있다”고 답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국무부는 최초 결정을 번복하고 북한 측에 접촉한 것입니다.
단순히 법원 문건을 전달한 것이지만 미국과 북한 사이에 대화 창구가 여전히 열려 있다는 사실이 이번에 새롭게 알려졌습니다.
과거 미국과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사이에는 비공식 대화 창구인 이른바 ‘뉴욕채널’이 개설돼 있었습니다.
다만 지난해 3월 한국 언론은 한국 외교부 고위 당국자의 발언을 인용해 뉴욕채널이 의미 있게 작동한다고 볼 수 없다고 전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 당시 국무부는 VOA에 “미국은 북한에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많은 대화 창구를 유지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국무부의 ‘외교적 경로’를 통해 미국인이 대북 소장을 송달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는 점도 이번에 거듭 확인됐습니다.
일반적으로 미국인의 대북 소송은 원고의 주장만을 바탕으로 한 ‘궐석 판결’로 최종 결론이 내려집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피고에게 소송 내용이 정식으로 고지돼야 하고, 60일 이내에 피고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공식 확인돼야 합니다.
과거 북한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미국인 등은 소송 제기 후 국제 우편 서비스인 ‘DHL’을 통해 소장과 판결문 등을 북한 외무성으로 보냈었습니다.
하지만 ‘DHL’이 2020년부터 유엔이 아니거나 외교 목적이 아닌 우편물에 대한 북한 내 서비스를 중단하면서 대북 소송인 등은 북한에 소장을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왔습니다.
다만 최근 미국 연방법원은 미국 대북 소송인 등이 소셜미디어와 이메일을 통해 북한에 소송 사실을 고지할 수 있도록 공식 허가했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 적군파 테러 희생자 유족 등은 이미 지난해 북한의 대외선전 매체 ‘우리민족끼리’의 엑스(구 트위터) 계정에 소송 사실을 고지했고, 법원도 이를 공식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외교적 경로’를 통한 소송 고지는 일본 적군파 테러 희생자에겐 큰 의미가 있진 않습니다.
앞서 북한에서 훈련받은 일본 적군파 요원의 테러로 사망한 카르멘 크레스포-마티네즈 등의 상속인, 그리고 부상자와 가족 등 131명은 지난 2022년 북한 정권을 상대로 약 40억 달러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일본 적군파 요원 3명은 지난 1972년 5월 이스라엘 텔아비브 로드 공항 구내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자동소총을 난사해 26명이 숨지고 80여 명이 다쳤습니다.
북한은 적군파의 테러 모의를 돕고 일부 테러범들을 훈련하는 등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피고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김동식 목사의 부인인 김영화 씨와 딸 다니 버틀러 씨, 아들 김춘국 씨는 지난 2020년 9월 북한 정권을 상대로 워싱턴 DC 연방법원에 소장을 제출한 경우입니다.
김동식 목사는 2000년 1월 탈북민을 돕다가 중국에서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납치된 뒤 평양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앞서 김 목사의 아들인 김한 씨와 남동생 김용석 씨는 2009년 워싱턴 DC 연방법원에 북한 정권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해, 1심 패소와 항소심 등을 거쳐 2015년 북한이 약 3억3천만 달러를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받은 바 있습니다.
따라서 김 목사 부인과 딸 등이 제기한 추가 소송에서도 유사한 판결이 예상됩니다.
미국 연방법은 다른 나라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지만 ‘외국주권면제법(FSIA)’을 근거로 북한과 같은 ‘테러지원국’은 예외로 하고 있습니다.
앞서 북한은 1988년 최초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된 뒤 2008년 해제됐지만 2017년 11월 트럼프 행정부에 의해 다시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돼 현재까지 이 지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VOA 뉴스 함지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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